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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예또 Oct 08. 2023

18) 프라하, 사랑에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한 도시


 베를린 다음으로 내가 선택한 도시는 프라하였다. 아마 대다수 한국인에게 체코라는 나라보다 수도의 인지도가 더 높은 곳이지 않을까 싶은데, 그 배경에는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이 기여한 바도 적진 않을 것이다. 연인들이 함께 야경을 바라보며 사랑을 속삭이러 간다는 그 도시 프라하에 사랑으로 받은 상처가 채 아물기 전인 어떤 한국인 여행자가 홀로 배낭을 멘 채로 씩씩하게 가고 있었다.


 프라하의 호스트 필립은 한국을 매우 사랑하는 젊은 청년이었다. 그의 집에 들어서자마자 벽에 떡하니 쓰여있던 '어서 와'라는 문구는 그가 얼마나 한국에 진심인지를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매년 여름마다 한국으로 여행을 간다던 그는 오랜만의 한국인 게스트에 들뜬 것 같았다. 아침마다 일찍 일어나 출근을 해야 했던 그는 본인이 쓰는 방을 나에게 주고 거실에서 소파에서 잠을 잤다. 그는 나를 위해 냉장고에 빵, 햄, 치즈 등을 항상 종류별로 채워두었다. 그러면 나는 그가 사놓은 음식들로 아침을 먹고, 그가 퇴근할 때를 맞춰 내가 봐온 장으로 저녁을 차렸다.


 세심하고 꼼꼼한 성격의 필립은 내가 그의 집으로 온 이후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결정의 중심을 나로 맞추었다. 그는 최대한 일찍 퇴근해서 나와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했고, 내가 필요하고 원하는 것들을 다 맞춰주려고 애썼다. 그가 나에게 베푸는 호의가 친구로서 인지 여자로서 인지 그 선을 넘길 듯 말듯하여 나는 조금 헷갈렸지만, 생긴 것도 번듯하고 행동거지와 마인드도 바른 청년인 그가 나를 어떤 방식으로 좋아하는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았다. 어느샌가부터 나도 그가 편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의 집에서 머문 지 일주일이 넘었을 무렵 나는 다시 다음 일정을 준비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와 함께 지내는 동안 푹 쉴 수 있어서 몸과 마음은 편했지만 나는 어쩔 수 없이 계속 움직이고 떠나야 하는 여행자의 신분이었다. 더 미적거리다가는 그와 헤어지는 일이 점점 더 힘들어질 것 같아서 나는 결국 폴란드로 향하는 야간기차를 끊었다. 그 사실을 그에게 이야기하자 그는 못내 서운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때부터 하루하루 그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져 갔다.


 드디어 필립과 함께하는 마지막 날, 우리는 함께 근처의 호수로 드라이브를 갔다. 그는 나를 보며 물었다.


 "이렇게 가고 나면 언젠간 나를 잊어버릴 거지?"

 "왜 그런 걸 물어?"

 "다른 남자를 만나면 내 생각은 하지도 않을 거지?"

 "아니, 나는 너를 오래도록 잊지 않을 거야."


 어른스러웠던 필립은 점점 아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자꾸만 사랑을 갈구하고 확인받고 싶어 하는 그에게 나는 조금씩 질린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정말 좋은 사람이지만, 나와 더 깊은 사이가 될 정도로 잘 맞는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이 점점 확실해졌다. 나는 내가 그를 좋은 추억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나도 그에게 그렇게 남고 싶어서 내 물건 하나를 그에게 남겼다. 그러다 결단코 내 물건을 받지 않겠다는 그와 나 사이에 작은 실랑이가 벌어졌다.


 "내가 아까 왜 네가 피자를 먹고 남긴 접시를 받자마자 바로 설거지했는 줄 알아?"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너를 보내고 혼자 집에 돌아왔을 때 너에 관련된 걸 보면 네가 다시 생각나서 미칠 것 같아서 그래. 그러니까 너에 관련된 물건은 하나도 남기지 말고 떠나 줬으면 좋겠어."


 강경한 그의 태도를 보고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가 혼자 남겨지는 일을 그토록 힘들어할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거였다. 오랜 기간 자취를 했던 경험이 있는 나도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이가 떠난 공간에 홀로 남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를 겪어봤기에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수가 없었다. 그의 마음이 그토록 진심이었을지 미처 몰랐던 나는 이렇게 이기적으로 갑자기 떠나는 일이 너무 미안하게 느껴졌다.


 기차역에 도착한 우리는 짧은 포옹을 마지막으로 작별을 했다. 기차에 올라탄 나를 끝까지 지켜보고 있던 필립은 기차가 출발하자 나를 마지막까지 놓치지 않겠다는 듯 속도를 맞춰 걷다가 이내 뛰기 시작했다. 그가 뛰는 속도가 결국 기차를 따라잡을 수는 없었기에 전속력으로 뜀박질을 하는 그의 모습이 창문을 통해 점점 멀어져 갔다. 얼마 전까지 사랑에 상처받고 힘들어했던 내가 이제는 누군가를 힘들게 만드는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에 기분이 이상했다. 하지만 그가 겪게 될 힘든 시간도 또 다른 누군가에 의해 치유를 받게 될 터였다. 우리는 이렇게 서로 사랑을 하고, 상처를 주고, 위로하면서 살아가는 거구나. 잔인하지만 그게 바로 삶과 사랑인 거였다.




 프라하에서 저녁에 출발한 기차는 다음날 새벽 4시에 폴란드 크라쿠프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야간기차인지라 침대석을 예약했던 나는 기차가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잠에들 준비를 했다. 혹시 몰라 도착 예정시간에 알람을 맞춰놨는데, 알람을 듣고 일어나 보니 지도상에서 크라쿠프까지는 아직도 꽤 먼 거리가 남아있었다. 대수롭지 않게 연착이 되는 거라고 생각한 나는 너무 졸린 탓에 금세 다시 잠에 들었다. 중간중간 짧게 자다 깨다 하면서 계속 지도를 봤는데 기차가 움직이는 속도는 여전히 너무 느렸다.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깊게 잠에 들어 버렸고, 잘 달리던 기차가 별안간 멈춘 것 같은 느낌에 살짝 눈을 떠보니 그곳이 바로 내가 내려야 할 역인 거였다.


 지금 당장 내려야 한다는 사실에 나는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기차가 언제 출발할지 몰라서 나는 최대한 빨리 나의 짐들을 가지고 이 기차에서 내려야 했는데, 짐이 이곳저곳 흩어져 있다 보니 나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나는 급히 위층에서 자고 있던 승객을 깨웠다. 그가 도와주지 않으면 위에 올려놓은 내 배낭을 내릴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얼떨결에 나 때문에 갑자기 잠에서 깬 그는 급박한 내 목소리를 듣고 바로 상황을 파악한 것 같았다. 나는 그가 내려주는 내 짐가방을 받자마자 바로 어깨에 들쳐 메고 뛰기 시작했다. 기차에 내려서 시계를 보니 예상 도착시간으로부터 2시간 반이나 지난 시각이었다. 내가 내린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출발하는 기차 창문으로 미처 챙기지 못한 생수 두 병이 보였다.


 아침 안개가 자욱한 크라쿠프는 막 출근하려는 사람들로 정신이 없었다. 나는 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예약한 호스텔로 지도를 보며 걸어가기 시작했다. 크라쿠프의 첫인상은 색깔로 비유하자면 회색이었다. 칙칙한 하늘 아래 칙칙한 건물 사이로 칙칙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지나다녔다. 걸어가는 길에 유료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나오는데 웬 덜떨어지게 생긴 남자 둘이서 나를 보더니 "칭챙총"하며 키득거렸다. 배가 고파 들어간 편의점에서는 편의점 유리창에 떡하니 붙여놓은 핫도그를 팔지 않는다면서 나를 내보냈다. 하지만 이런 일들 보다도 진짜로 기분 나쁜 일은 호스텔 안에서 벌어졌다.


 내가 예약한 호스텔은 플랫 안에 임의로 2층침대를 넣어서 만든 숙박업소였는데, 내가 묵었던 방은 한 방 안에 2층침대 6개가 빽빽하게 놓여있는 남녀혼성 도미토리였다. 저녁때가 되자 공용주방이 시끌 거리는 게 게스트들끼리 술판이 벌어진 것 같았다. 나는 그 시끄러운 소리에 제대로 쉴 수도 없고 배도 슬슬 고파와서 저녁을 먹으러 갈 심산으로 외출 채비를 했다. 그때 수염이 덥수룩한 사내 두 명이 내 침대로 와서 내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여행을 하며 다양한 사람들을 사귀는 데에 큰 거리낌이 없는 나는 처음엔 호의적인 태도로 삼촌뻘인 그들의 말에 친절하게 대답을 했다. 어눌한 영어로 나에 대해 이것저것을 물어보던 그들은 갑자기 나에 대해 무례한 질문을 하다가도 자기들끼리 러시아어로 대화하면서 웃기를 반복했다. 기분이 나빠진 나는 더 이상 그들을 상대할 가치가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자리를 잠깐 비켜달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러자 그중 한 명이 대뜸 내게 뺨을 내밀면서 자기 뺨을 검지손가락으로 톡톡 치는 거였다. 지금 자기들이랑 같이 술을 먹든지 그렇지 않으면 자기한테 뽀뽀를 하라는 뜻이었다. 나는 힘겹게 이성을 유지한 채로 정중히 거절을 했다. 웃음기가 싹 가신 나의 얼굴을 보자 그들은 그제야 자리를 비켜주었다.


 칸막이도 없는 그 도미토리에서 나는 그들이 혹시 간밤에 내게 또 장난을 치거나 해코지를 할까 봐 밤새 긴장을 한 채로 잠에 들어야 했다. 하필이면 그 이상한 장난을 친 남성이 내 바로 아랫자리여서 더 신경이 쓰였다. 유난히 그 호스텔은 다른 호스텔들처럼 내 또래의 여행자들이 많지 않았다. 대부분의 투숙객이 다 그들과 한 패인 장기투숙자들 같았는데 그날 밤 여성 숙박객도 나 한 명뿐이라서 괜히 더 겁이 났다. 최악의 첫날을 선사해 준 폴란드에 나는 끝끝내 정을 붙이지 못했고, 결국 며칠 뒤 미련 없이 그곳을 뜨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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