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를 마지막으로 나의 본격적인 발칸유럽 여행이 시작되었다. 나의 첫 목적지는 세르비아의 노비사드였는데 그곳에서 만난 호스트도 여간 골 때리는 사람이 아닐 수 없었다. 노비사드에 밤늦게 도착한 나는 버스터미널에서부터 호스트의 집까지 2km의 거리를 도보로 이동한 끝에 그의 집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호스트가 시키는 대로 도어벨을 울려봐도 나는 그의 모습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한참을 헤맨 끝에 내가 문 앞까지 가서 노크를 하자 그제야 그가 모습을 드러내는 거였다. 보통 처음 호스트집을 찾아갈 땐 게스트들이 헤멜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최소한 도어벨이 울리면 미리 내려와 보는 호스트들이 대부분인데 이렇게까지 느긋한 호스트는 처음 만나 나는 적잖이 당황을 했다.
거기까진 '뭐, 그럴 수도 있지.' 하며 넘길 수 있었는데 더 어이없는 상황은 그 이후에 펼쳐졌다. 나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던 그는 별안간 시계를 확인하더니 배가 고파서 피자를 시켰다면서 혼자 피자를 가지러 나가는 거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피자를 손에 받아 들고 온 그는 내 바로 코앞에 앉아서 혼자 피자를 먹기 시작했다. 한 입 먹어보라는 권유나 제안 한 마디도 없는 그 정적 속에 그가 피자를 게걸스레 먹어치우는 소리만이 적막한 공간을 가득 메웠다. 집에 손님을 초대해 놓고는 집 문 밖으로 한 번 나와보지도 않았으면서, 직접 가게에 들러 피자를 가지고 와서 혼자 먹어치우는 그의 놀라운 인성에 나는 순간 사고가 정지되었다.
별 볼일 없는 도시와 호스트의 멋진 인성까지 합쳐진 그곳에서 정이 떨어진 나는 곧바로 세르비아의 수도인 베오그라드로 향했다. 그곳에서 만난 호스트는 노비사드의 호스트와 완전히 정반대였다. 중국에서 온 덕화는 중국전기 관련 기업의 발칸유럽 지부에서 근무하는 직장인이었는데, 숙소를 회사에서 지원해 주는 덕분에 혼자 살면서도 방이 2개에 넓은 거실을 갖춘 플랫에서 지냈다. 그는 첫날 나에게 직접 만든 중국식 닭요리를 대접해 주었고, 비가 오던 날 훠궈가 먹고 싶다는 내 말에도 직접 손맛을 발휘해 뜨끈한 훠궈를 만들어 주었다.
원래부터 여유로웠던 가정에서 자란 동위와 달리 덕화는 진짜 어려운 집에서 열심히 노력하여 여기까지 온 케이스였다. 그는 대학생인데도 불구하고 한 달에 한화로 고작 8만 원 정도의 용돈으로 지내느라 그때 만났던 여자친구와 데이트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한 것도 아쉬움으로 남아있다고 했다. 농구 외에는 별다른 취미도, 의지할만한 친구도 주변에 없던 그는 일을 하면서 담배가 엄청 늘었다고 했다. 쳇바퀴 같은 일상을 버텨내는 그의 초라한 어깨가 안쓰러워 자유로웠던 대학생 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냐고 물었더니 그는 바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래도 능력껏 돈을 벌고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지금이 훨씬 행복하다고 했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표정이 어딘가 가엽게 느껴져서 나는 그가 진심으로 더 행복해질 수 있기를 바랐다.
세르비아 다음으로 불가리아에 도착한 나는 소피아의 호스트 댄의 집에서 머물렀다. 아침부터 덜그럭거리는 소리에 무슨 일을 벌이고 있나 싶어서 나가보니 주방에서 그가 사부작거리며 뭔가를 하고 있는 거였다.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아침식사를 준비 중인 모습이었는데, 그는 갈린 오리고기를 아무런 가루도 넣지 않고 동그랗게 뭉치더니 에어프라이어에 넣기 시작했다. 뭔가 많은 재료가 생략된 것 같아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는데 그는 의심하지 말라면서 자기를 믿어보라는 거였다. 미심쩍었지만 배가 많이 고팠던 탓에 나는 그가 차려준 아침식사를 맛있게 해치웠다. 그가 만든 심플한 고기완자는 생각보다 맛있었다.
아침을 다 먹고 나니 이른 시간부터 흥을 주체하지 못하던 그가 별안간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레퍼토리가 다 바닥났는지 이번엔 신나는 노래에 맞춰 현란한 궁댕이 댄스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나랑은 고작 5살 차이인데도 그를 보고 있으면 꼭 장난꾸러기 사촌동생이 까부는 모습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해맑고 솔직했던 그의 매력 때문에 나는 알게 모르게 많이 웃을 수 있었다.
불가리아에서 다시 루마니아로 넘어가는 날, 나는 일부러 여유롭게 소피아의 기차역에 와 있었다. 아직 버스를 타기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던 나는 기차역 2층 구석에 앉아 버스시간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검은 유니폼을 입은 경비들이 내게 다가와서 불가리아어로 무슨 말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알아듣지 못한 내가 갸웃거리자 둘 중 한 명이 짧은 영어로 이제 곧 기차역의 문이 닫힐 예정이니 나가야 한다고 설명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짐을 주섬주섬 싸서 밖으로 나왔다.
나와보니 바깥엔 물 한 병 살 곳도 마땅히 없어서 나는 사람이 다 빠진 황량한 기차역에 다시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이번엔 아까 내게 왔던 경비 말고 다른 경비가 가까이 다가오는 거였다. 나는 급한 마음에 빨리 자판기에서 물 한 병만 뽑아서 나가겠다고 영어와 바디랭귀지를 섞어가며 말을 했는데, 그가 괜찮으니 자기를 따라오라며 한 층 아래에 위치한 슈퍼로 나를 데려가는 거였다. 출출했던 차에 간식 같은 것들도 살까 싶어서 가격을 물어봤다가 불가리아 돈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 퍼뜩 기억난 나는 결국 물 한 병만 집은채 계산대로 향했다. 그런 나의 모습을 보던 아다나스는 갑자기 간식과 음료수까지 이것저것을 막 골라서 계산대 위에 올려놓기 시작했다. 현금이 없어서 못 사는 모습을 돈이 없어 못 사는 줄로 알았던 모양이었다.
결국 아다나스는 나에게 봉지 한가득 담은 간식거리들을 전해주었다. 대략적인 그들의 평균 소득을 아는 나는 벼룩의 간을 빼먹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어 몇 차례 거절했지만 그의 태도 역시 나만큼 강경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에게 진심이 담긴 감사인사를 전한 후 그가 준 간식꾸러미를 소중하게 품에 안았다. 본인의 작은 호의가 너에게 불가리아에 대한 좋은 기억으로 남을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다던 그의 마지막 부탁을 나는 절대 잊을 수가 없었다.
보통의 여행기라면 아마 좋은 여운을 남기며 여기까지만 썼을 텐데, 나는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거짓품은 로망을 남겨주기보단 현실의 무서움을 일깨워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에 고민 끝에 조금 더 적기로 했다. 다른 지역 남자들도 어느 정도는 다 그렇겠지만, 내가 겪은 바 발칸반도 남자들의 호의 기저에는 불순한 의도가 숨겨져 있는 빈도가 잦은 편이다. 누구라고 콕 집어 말을 할 수는 없지만 위에 좋게 언급한 호스트를 포함해서 나에게 직접적 혹은 간접적인 방법으로 같이 밤을 보내자는 요구를 한 사람들도 왕왕 있었다. 그나마 내가 만난 호스트들은 정중히 거절을 하면 그 거절을 받아들일 줄 아는 이성적인 사람들이라 별 탈은 없었지만, 이런 일들은 특히 여성 카우치 서퍼들에게 종종 발생하는 일들이니 이유 없는 호의는 일단 의심을 해볼 필요가 있다. 특히 여행지가 발칸반도라면 더욱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