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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예또 Oct 09. 2023

21) 반전의 매력이 가득한 부쿠레슈티와 이스탄불


 여행을 할 때 나는 스스로를 항상 비공식 외교관으로 여기며 한국인으로서 책임감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한국인의 꼬리표를 달고 행하는 모든 행동들이 누군가에겐 '한국인은 그렇더라.' 하는 편견을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같은 원리로 나는 나와 잘 맞지 않는 사람을 만나면 으레 그 나라까지 꺼려지곤 했다. 그렇게 꺼려졌던 나라 중 하나가 바로 워크캠프 때 만났던 디아나의 고향인 루마니아였다.


 다시 만날 계획을 세우던 동위와 나는 처음엔 그리스를 가려고 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내가 무비자로 쉥겐국가를 여행할 수 있는 날이 며칠 남지 않아 입국이 거절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쉥겐국가가 아닌 나라를 대상으로 고려하다 보니 그나마 같이 갈만한 곳이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였다. 이름조차 생소한 도시였지만 동위는 친구들에게 그곳의 클럽거리도 나쁘지 않았다는 이야길 들은 적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저 그를 만날 목적으로 그 도시를 갔던 거였다.


 부쿠레슈티는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보다는 크고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보다는 조금 지저분했다. 그렇지만 그곳에서 생에 처음 구경한 크리스마스 마켓은 소박하지만 아기자기한 맛이 있었고, 뱅쇼는 기대보다 맛은 없었는데 얼어있는 내 손을 녹이는 용도로는 제 역할을 발휘했다. 크리스마스 마켓 한 편에 조성되어 있던 아이스링크에서 동위와 나는 함께 스케이트를 탔다. 빙판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 본 게 너무 오랜만이어서 그랬는지 나는 다시 동심으로 돌아간 어린아이가 된 것 같았다.


 부쿠레슈티의 클럽은 정말 상상 이상이었다. 작고 인지도도 없는 도시라고 생각해 클럽도 별 기대를 안 했는데 골목골목마다 각자의 개성을 뽐내는 클럽들이 즐비했다. 클럽들의 규모가 큰 편은 아니라서 펍과 클럽의 그 사이 어디쯤의 느낌이었는데, 그게 또 아늑한 맛이 있어서 매력적이었다. 우리는 여느 때처럼 데낄라를 진탕 먹고 내일이 없는 것처럼 춤을 추며 놀았다. 마치 이 젊음을 누리지 않는 자는 유죄인 것처럼.


 동위는 내가 항상 한식과 중식을 그리워하고 있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를 만날 때면 항상 한식이나 중식을 사줬다. 부쿠레슈티에서는 우리가 여태껏 먹어 본 유럽의 숱한 중식집 중에서도 가장 현지의 맛과 흡사해 우리 둘 다 엄지를 치켜세우게 만들었던 훠궈집이 있었는데, 시내에서 거리가 꽤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식당을 부쿠레슈티에 머무는 3일 동안 두 번이나 찾았다. 부쿠레슈티에서의 마지막 날에도 우리는 그 식당에서 마지막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문득 느꼈던 것이다. 오늘 이후로는 우리가 다시 만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크게 다투지도, 기분이 상하지도 않은 평소와 다름없는 날이었는데 우리 사이에 그냥 그런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현실적으로 우리의 상황이 안정적으로 만남을 지속해 가기는 힘든 상황임을 알기에 우리는 예전부터 장난처럼 '10년 뒤에도 우리 둘 다 미혼인 상태면 그땐 서로가 운명인 거라고 생각하고 결혼하자.'라는 말을 했었다. 앞으로의 일은 하늘에 달려있겠지만, 그때의 우리는 그저 평범한 하루 속에 암묵적인 이별을 하고 있었다.


 루마니아에서는 유독 따뜻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부쿠레슈티 다음으로 향했던 도시 브라쇼브의 호스트 알렉산드라는 일주일 동안 나를 큰언니처럼 챙겨주며 따뜻한 보금자리를 제공해 주었고, 튀르키예로 넘어가는 야간버스를 놓치기 일보직전의 상황에 발만 동동 구르고 있던 나를 위해 코스민과 만달리나는 택시비도 받지 않고 기꺼이 나를 터미널까지 데려다주었다. 인도에서 태어났지만 루마니아에 정착생활을 하고 있던 레티큘도 루마니아 현금이 하나도 없는 나를 걱정하며 선뜻 돈을 내밀었다. 그들의 작은 호의들이 내겐 이 여행을 지속할 수 있는 큰 응원과 힘이 되어줬다.




 이윽고 나는 발칸반도의 마지막 국가 튀르키예에 도착했다. 튀르키예는 워낙 유명한 것들도 많고 물가도 부담이 없어서 내가 기대를 많이 했던 나라 중에 하나였다. 카우치 서핑에 나의 예상 도착일정을 업로드했더니 셀 수 없이 많은 튀르키예의 남성 호스트들에게서 요청이 쏟아졌다. 잠깐 사이에 도저히 답장을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메시지가 와서 나는 그중에 진중한 호스트를 골라내느라 꽤 애를 써야 했다. 결국 나는 고심 끝에 얼디라는 호스트의 집에 가기로 결정을 했다. 그가 나를 위해 게스트룸 하나를 통째로 빌려줄 수 있다고 한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차로 나를 데리러 오겠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개인 사업을 한다던 그는 소유하고 있던 집이나 차를 봤을 때 경제적으로 꽤 여유롭게 사는 것 같았다. 그는 일주일에 두세 번씩 바차타 댄스 수업을 들으러 다녔는데 그가 보여준 영상을 보고 나는 꽤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여성이 거의 남성에게 안기다시피 바짝 붙어서 엉덩이를 노골적으로 흔드는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얼디는 내게 부담스러운 부탁이나 요청을 하진 않았지만 종종 너무 가까운 거리에서 느끼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 나 혼자 밖에 나가서 이것저것 구경하느라 연락이 조금 늦으면 다른 남자랑 놀다 온 거 아니냐며 서운한 티를 냈다. 그의 집에서 머무는 것은 편했는데 그가 나에게 하는 행동이 점점 부담스러워져서 나는 결국 호스트를 바꿨다.


 두 번째 호스트는 레퍼런스를 꼼꼼히 읽고 열심히 추려냈는데, 그렇게 해서 연락한 호스트가 자기는 이스탄불이 아닌 다른 도시에 살고 있고 자기와 친한 친구를 나와 연결시켜 주겠다고 했다. 원래 레퍼런스가 없는 호스트의 집에는 절대 가지 않았만 그의 레퍼런스에서 꽤나 신뢰도가 느껴졌기 때문에 나는 그의 추천을 믿어보는 모험을 해보기로 했다. 그렇게 만난 푸라트는 푸근한 삼촌 같은 사람이었다. 영어를 거의 하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는 번역기를 사용하여 대화를 하거나 바디랭귀지를 통해 의사소통을 했는데 그는 어딘가 모르게 사람을 챙기는 데에 서툰 구석이 많았다.


 말도 잘 통하지 않고 가끔 엉뚱하게 행동하는 부분 때문에 나는 그가 답답했다. 하루는 나에게 하고 싶은 일이 있냐고 묻는 그에게 카이막을 맛보고 싶다고 말했는데 그가 나를 태우고 향한 곳은 웬 다리 위였다. 그는 나에게 그곳의 야경과 낚시하는 사람들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였다. 카이막을 파는 곳으로 데려갈 것으로 예상했던 나는 그에게 왜 카페로 가지 않느냐고 물었고, 그는 저녁엔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런 곳은 주차하기가 힘들다고 답했다. 이스탄불에 머물 날이 얼마 남지 않았던 나는 그 때문에 괜한 시간낭비를 한 것 같아서 속으로 짜증이 났다.


 결국 다음 날 낮에 혼자 시내로 나가 카이막부터 시작해 고등어 케밥, 홍합밥(미디예 돌마), 그리고 터키쉬 딜라이트까지 먹고 싶었던 튀르키예 음식을 혼자서 다 클리어를 한 나는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그의 집에 돌아왔는데 나의 귀가를 기다리던 그가 나에게 뭔가를 내밀었다. 내가 어제 카이막을 먹지 못해서 기분이 상했던 것을 기억한 그가 나를 위해 카이막을 사 온 거였다. 그걸 내게 주는 그의 표정이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 같아서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막을 수가 없었다. 푸라트는 겉으로 잘 챙기진 못해도 이렇게 속으로는 섬세했던 사람이었다.


 이스탄불은 나의 고정관념을 많이 깨어준 곳이었다. 튀르키예의 수도도 아니면서 수도보다 더 유명했고, 유럽과 아시아 중 딱 잘라 어느 하나라고 말하기도 애매했으며, 도시의 중심에 강이 아닌 해협이 위치해 있어서 비둘기보다 갈매기가 더 많은 도시였다. 어딜 가나 사람들이 붐볐고 맛있는 음식들이 즐비했으며 도시 자체가 항상 활기에 차있는 모습이었다. 여러 매력이 가득했던 그 도시에서 나의 튀르키예 여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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