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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예또 Oct 10. 2023

22) 튀르키예 카우치 서핑 리뷰; 최고의 호스트 편


 야간버스는 새벽 4시가 넘은 시각에 데니즐리 터미널에 도착했다. 나는 미리 이른 시각에 도착하는 것에 대해 양해를 구했던 호스트 하림의 집으로 곧장 걷기 시작했다. 그의 집 근처에 도착하니 시간은 새벽 5시에 가까워져 오고 있는데 나는 어디로 가야 그의 집이 나오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튀르키예의 유심카드 값이 너무 비싸 사지 않았던 탓에 통화와 데이터를 쓸 수 없었던 나는 한참을 기다리다 지나가는 행인에게 부탁해 하림에게 전화를 했다. 잠에서 덜 깬 부스스한 모습으로 마중 나온 그를 따라 나는 그의 집 소파에서 늦은 잠을 청했다.


 다음 날 잠에서 깨어보니 그는 이미 출근을 한 뒤였다. 나는 샤워를 하고 밖으로 나와 늦은 아침을 먹고 곧바로 튀르키예의 유명 관광지 중 하나인 파묵칼레(석회온천)로 가기 위해 다시 터미널을 찾았다. 그때 퇴근을 하고 집에 온 그가 나에게 파묵칼레를 가이드해 주겠다며 연락을 해왔고 우린 그곳에서 다시 만나 함께 파묵칼레로 향했다. 이미 수 차례 그곳을 방문한 적이 있는 그는 능숙한 듯 내게 설명을 이어갔다. 그는 하얀 설원같이 눈부시게 펼쳐진 석회온천을 배경으로 전문 사진사처럼 열정을 갈아 넣어 내 인생샷도 만들어 주었다.


 파묵칼레 관광이 끝나고 다시 그의 집으로 돌아간 우리는 그가 만든 닭요리에 매운 튀니지식 소스를 넣어 빵에 찍어 먹으며 월드컵 경기를 봤다. 튀니지 출신인 그는 튀르키예 데니즐리에서 자리를 잡은 지 이제 막 6년 차가 되었다고 했다. 어딘가 4차원적인 매력이 있는 그는 솔직하고 다정했다. 그와 함께하는 시간은 편했지만 좁고 딱딱한 소파에서 덜덜 떨며 잠에 들었던 지난밤의 경험으로 인해 나는 아쉽지만 다른 호스트에게 가기로 결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데니즐리의 두 번째 호스트 하릴은 초등학교 교사였는데 그 사실을 알고 나서 나는 상당히 놀랐던 기억이 있다. 덥수룩한 수염에 어깨까지 기른 머리, 그리고 어딘가 퀭한 눈빛이 전형적인 선생님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상당히 멀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의 집은 무슨 괴짜 예술가의 집처럼 정신이 산만했는데, 특징이 있다면 한 여성의 사진과 그림들이 벽 가득히 붙어있었다는 점이었다. 그가 본인의 영원한 사랑이자 뮤즈라고 소개한 그녀는 튀르키예의 여배우 튀르칸 쇼라이(Türkan Şoray)였다.


 그의 집착스러운 팬심에 나는 그가 결혼도 하지 않은 노총각일 거라고 지레짐작을 했는데 알고 보니 이미 초등학생 아들을 둔 돌싱이었다. 하루는 그의 집으로 놀러 온 아들을 직접 만나볼 수가 있었는데 유난히 조용하고 얌전하던 그 아이는 내가 사 온 바클라바를 같이 먹자는 말에도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신기했던 건 그저 철부지 아저씨처럼 보였던 그도 아들 앞에서는 의젓한 아빠가 된다는 점이었다.


 어느 날 그가 나에게 본인의 일터인 초등학교에 한 번 와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했다. 튀르키예의 로컬 초등학교를 구경할 수 있다는 말에 나는 흥미가 생겨서 바로 콜을 외쳤다. 그와 약속한 시간에 그가 근무 중인 학교로 갔더니 쉬는 시간을 맞아 밖으로 나온 아이들이 재잘거리며 뛰노는 모습이 보였다. 하릴을 만나 학교의 운동장과 매점을 구경하면서 돌아다니고 있던 나에게 이내 피리 부는 사나이처럼 아이들이 한둘씩 따라붙기 시작했다. 한두 명이었던 아이들은 순식간에 나를 에워쌀 정도로 불어났고, 머지않아 학교의 입구를 꽉 막아버리는 바람에 하릴이 나서서 아이들을 통제해야 하는 상황까지 치달았다. 나는 처음으로 겪어보는 연예인급 대우에 몸 둘 바를 몰랐다.


 이번에는 교실로 들어가자 아이들의 수많은 질문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주로 여자아이들이 케이팝 스타들에 대한 질문들을 많이 했는데, 그곳에서도 나는 BTS의 위엄에 대해 다시 한번 존경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간단히 자기소개를 한 후 기본적인 한국어 문장을 몇 가지를 가르쳐 주었는데, 갑자기 몇몇 아이들이 내게 춤과 노래를 보여줄 수 있냐며 요청을 하기 시작했다. 어디 가서 멍석 깔아주면 절대 빼본 적이 없는 나는 그렇게 아이들 앞에서 무반주 노래와 댄스를 선보였다. 대학교 댄스동아리 출신에 교내 노래대회 우승 전적이 있던 내가 열심히 갈고닦았던 끼들이 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나는 하릴의 집에서 함께 지냈던 인도인 게스트 프라야와 함께 페티예로 향했다. 페티예는 세계 3대 패러글라이딩 성지로 꼽힐 만큼 아름다운 지중해를 품은 곳이었는데, 튀르키예까지 온 이상 그곳에서 하는 패러글라이딩의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급하게 호스트를 찾던 나는 오칸이라는 호스트와 연락이 닿았고, 그가 한 명의 동행을 더 데려가도 되냐는 나의 요청을 흔쾌히 수락해 주어서 우리는 함께 그의 집으로 향했다. 오칸은 룸메이트와 함께 작은 여행사를 운영 중인 매우 활달하고 사교적인 청년이었다. 푸르른 지중해가 한눈에 들어오는 베란다 뷰를 가진 그 집에서 그는 우리를 위해 선뜻 본인의 방을 내어주고 거실에서 잠을 청했다.


 아침 일찍 페티예에서 환상적인 패러글라이딩을 마치고 오칸의 집으로 돌아와 쉬고 있던 나는 모르는 사람에게 DM을 하나 받았다. 본인을 페티예에서 보트회사를 운영 중이라고 소개한 사람이 나에게 공짜로 보트를 태워주겠다며 연락을 한 거였다. 평소였으면 거들떠도 안 봤을 텐데 그날따라 시간이 많았던 나는 그와 대화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생판 모르는 남자를 따라 보트를 타는 건 위험할 것 같은데 같이 차 한 잔 마시는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아서 우리는 같이 카페를 가기로 했다. 머지않아 그는 약속시간에 맞춰 오칸의 집 앞으로 나를 태우러 왔다.


 베키르의 차에 올라탄 나는 경계심이 서린 눈빛으로 그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가 비싼 고급차나 외제차를 타고 올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그의 차나 행색이 여자를 꼬시려고 애를 쓰는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어딘가 여유로워 보이던 그는 대뜸 만나자마자 카메라부터 들이대는 나에 대해 많은 것을 묻지도 않았다. 그는 나의 질문에 무심한 듯 대답하다가 이내 어떤 호텔에 딸린 카페로 나를 데리고 갔다.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다 마실동안 대화가 별로 없어 지루했던 나는 그도 나와 비슷한 기분일 것 같아서 그가 곧 일정이 있다며 자리를 파할 것을 예상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뚱한 표정을 하고 나와 있으면서도 가야 한다는 얘기는 하지 않는 거였다.


 나는 그와 함께 산의 능선을 따라 이어진 해안도로에서 드라이브를 즐겼다. 그는 이따금씩 뷰포인트에 멈춰 나에게 사진 찍을 시간을 주곤 했는데, 내 사진을 찍어달라는 까다로운 요청에도 군소리 없이 내가 원하는 대로 맞춰주었다. 길가에서 사진을 찍다가 갑자기 내가 노래를 부르고 싶다고 하면 그는 내 옆에 앉아 내 노래가 끝날 때까지 잠자코 들어주었다. 배가 고프다고 했더니 그는 나를 초르바(발칸반도식 국물요리) 맛집으로 데려갔는데, 그곳에서 주문한 양머리 초르바에 마늘과 고춧가루를 팍팍 섞어 뜨끈하게 마시니 국밥에 대한 그리움이 눈 녹듯 사라졌다. 밥을 다 먹고 나서 우리는 고스트 시티라고도 불리는 관광지 카야코이를 구경했다. 해가 질 무렵 나를 단골 펍으로 데려간 그는 내게 맥주 한 잔을 샀다. 그리고는 다시 무사히 나를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내가 겪은 튀르키예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처음 보는 손님에게 굉장히 우호적이었다. 그들을 오래 알고 지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 뒤엔 어떤 모습이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처음 만난 사람이라 해도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베푸려는 마음이 많이 느껴졌다. 그래서일까. 튀르키예를 회상하면 그들의 따뜻했던 마음과 순박한 미소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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