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을 영국에서 동이와 함께 보내기로 한 나는 안탈리아에서 런던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나는 결국 떠난 지 반년만에 다시 이 도시로 돌아온 거였다. 입국 심사를 무사히 마치고 게이트를 빠져나오자 처음 런던에 도착했을 때 느꼈던 떨리고 설렜던 감정들이 그대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다양한 경험을 하고 다시 이곳에 돌아온 나는 반년 전의 나에 비해 많은 부분이 성장한 것 같아 스스로가 대견하게 느껴졌다. 연말의 분위기를 한껏 머금은 한겨울의 런던은 칙칙하고 어두웠다. 원래 추운 걸 싫어하기도 하고 겨울의 런던은 여름의 런던과 달리 매력이 느껴지지 않아서 나는 거의 모든 시간을 집 안에서 보냈다.
어느 날 웹서핑을 하다가 무심결에 아이슬란드에서 찍은 오로라 사진을 보게 되었다. 그저 '와 예쁘다. 나도 언젠간 아이슬란드에 꼭 가봐야겠다.'라고 생각하다가 아이슬란드가 어디에 붙어있는 나라인지라도 알아두려고 지도에서 검색을 해보니 의외로 영국에서 별로 멀지가 않은 거였다. 나는 퍼뜩 좋은 생각이 났다. 영국에 머물고 있는 지금만큼 아이슬란드에 가기에 좋은 기회가 없을 것 같다는 판단이 들면서 마침 내 생일이 다가오고 있었으니 이거야말로 두말할 것 없이 나에게 가장 좋은 생일선물이 될 것만 같았다.
머리로 이미 결정을 끝낸 나는 바로 비행기티켓을 끊었다. 여행계획을 세우는 것은 언제나 그랬듯이 가는 교통편을 끊어놓은 다음의 순서였다. 그때 내가 비로소 알게 된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었는데, 그건 바로 아이슬란드의 물가가 상상 이상이라는 거였다. 척박한 자연환경에 고립된 섬의 구조다 보니 자급자족이 사실상 불가능해서 모든 물품을 다 해외수입에 의존해야 하는 그 나라는 모든 물가가 다 너무 비싸다고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는 이동수단이었다. 관광객이 그곳을 여행하는 방법은 렌터카 혹은 패키지여행 둘 중 하나였는데 운전에 자신이 없는 나는 자연스레 선택지가 후자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자유여행을 선호하는 나는 끝내 패키지여행을 선택하고 싶지가 않았던 거였다.
결국 나는 다시 카우치 서핑을 켰다. 워낙 물가가 비싼 동네라서 그런지 호스트를 구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였고, 대신 운이 좋게 나와 비슷한 일정으로 홀로 아이슬란드 여행을 계획 중인 포르투갈 출신의 알렉스라는 친구를 한 명 사귈 수가 있었다. 그가 운전을 할 줄 알았기에 나는 렌트비용만 절반을 보태주면 되는 상황이라 부담감이 확 줄어들 수 있었다. 그러던 중에 튀르키예 페티예에서 만났던 친구 디뎀과 연락을 주고받다가 그녀 또한 나와 같은 날에 아이슬란드 여행을 계획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우리의 여행 멤버는 그녀의 친구 얄킨까지 총 네 명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이렇게 마음 맞는 여행동료를 찾을 수 있는 일은 거의 기적과도 같은 일이어서 나는 이번 여행이 상당히 기대가 되었다.
아이슬란드 공항에서 만난 우리 넷은 처음 시작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우리는 디뎀이 구한 호스트에게 개인적으로 차를 렌트할 예정이라 공항에서 그녀의 호스트가 사는 집까지는 알아서 이동해야 했는데, 시내까지 가는 공항버스마저 일인당 한화로 5만 원에 가까운 금액이라 너무 부담스러웠던 거였다. 무식하다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가성비 있게 아이슬란드 여행을 하겠다는 패기로 똘똘 뭉친 우리 넷은 눈짓으로 서로의 의중을 확인하고 곧바로 공항 밖으로 나갔다. 공항 밖엔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었지만 고작 그런 게 우리의 앞길을 막을 수는 없었다. 우리는 바로 큰 길가로 나가 히치하이킹을 시작했다.
나는 배낭여행을 하면서 카우치서핑을 통해 숙박비를 아끼는 나 같은 여행자처럼 히치위키라는 사이트를 통해 히치하이킹으로 교통비를 아끼는 여행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있지만 직접 해볼 거라는 생각은 미처 해보지 못했었다. 옆에 함께 기운을 북돋아주는 친구들이 있는데도 막상 엄지를 치켜든 손을 들려고 하니까 잘 올라가지가 않았다. 팔을 45도 정도로 뻗었다가 친구들 눈치를 보면서 조금 더 올려보고, 그러다 시간이 좀 더 흐르자 겨우 90도 정도까지는 팔을 올릴 수가 있게 되었다. 일부러 클락션을 크게 울리면서 지나가는 차를 만나면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간혹 가다 멈춰 서서 우리 사정을 도와주려는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면 이상하게 지난 설움이 자연스레 치유가 됐다. 우리는 두 명의 고마운 운전자를 만나 약 두 시간 만에 공짜로 시내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우리 넷은 디뎀의 호스트에게 빌린 차로 아이슬란드의 구석구석을 여행했다. 그러면서 우리 넷이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점점 각자의 캐릭터들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그중 알렉스가 점점 내 눈밖에 나기 시작했다. 우리 중에 나이도 제일 많고 말도 제일 많은 그는 정말 입을 가만히 놀리는 법을 모르는 사람처럼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처음엔 좋게 좋게 맞장구를 쳐줬지만 우리는 점점 그의 말에 반응조차 보이지 않게 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입은 말만 많을 뿐만 아니라 악취 또한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좁은 차를 타고 있던 우리는 그의 말이 많아질 때면 말없이 창문을 내리곤 했다. 그럴 때마다 바깥의 무서운 눈보라와 칼바람이 창문 틈으로 들이쳤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 안에서 질식으로 기절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대놓고 그에게 입을 닫으라는 말을 할 수는 없어서 비언어적인 방법으로 최대한 그의 문제점에 대해 어필했는데, 내가 아무리 코를 막고 인상을 쓰며 창문을 열어도 그는 나의 행동과 그의 행동에서 인과과정을 읽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뿐만 아니라 나이도 우리 중에 제일 많았던 그는 그 나이를 어디로 먹었는지 상당히 이기적이었다. 차를 운전할 수 있는 게 알렉스와 얄킨 둘 뿐이어서 어쩔 수 없이 우리 중에 가장 많은 고생을 해야 했는데 맏형인 알렉스는 그 상황에 상당히 불만이 생긴 건지 점점 게으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본인이 고집을 부려서 멤버 모두가 다 같이 고생을 하게 된 상황에도 일말의 미안한 감정 없이 뻔뻔하게 굴었다. 한 명이 대표로 차를 가지러 가서 우리가 있는 곳까지 태우러 올 수 있으면 남은 세 명이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기다릴 수 있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결국 혼자 가고 싶지 않다며 고집을 부렸다. 나는 점점 그와 함께하는 시간이 고통스러워졌다.
안 그래도 같이 있는 상황 자체가 짜증 나는데 그는 그런 내 기분을 알고서 일부러 더 그러는 건지 엎드려서 쉬고 있던 내 뒤로 와서 내 발을 간질이는 장난을 쳤다. 화들짝 놀란 나는 정색을 하면서 이런 장난을 싫어하니 치지 말라고 했더니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이런 장난 좋아하는 사람도 있어? 원래 다 싫어해. 그러니까 하는 거지."라고 말대꾸를 하며 같은 장난을 또 치려고 하는 거였다. 그가 발에 페티시가 있는 변태인지 그냥 원래 눈치가 전혀 없는 멍청인지는 내 알 바 아니지만 확실한 건 그는 정말 밥맛이라는 거였다.
넷이서 오순도순 모여서 작게나마 내 생일파티도 하고 여러 이야기를 나누며 재충전을 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길 바랐던 건 결국 내 큰 꿈이었던 거였다. 나는 결국 아이슬란드를 떠나기 전 날, 친구들과 마실 생각으로 공항 면세점에서 사 온 큰 위스키 한 병을 홀로 꼴딱꼴딱 마시기 시작했다. 어차피 가져갈 수 없는 거라면 그냥 나라도 마시고 취해버리자는 생각이었던 거였다. 남은 술을 갖다 버리는 한이 있어도 알렉스에게는 단 한 방울이라도 주고 싶지가 않아서 나는 내가 취할 만큼 마시고서 남은 술은 모두 싱크대에 부어버렸다. 누군가를 이렇게까지 싫어한다는 게 정말 너무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인 것 같았다.
알렉스 때문에 나의 첫 아이슬란드 여행이 완전 실패로 남을 뻔도 했지만, 원래 세상 일이라는 게 나쁜 일이 있으면 그중에 좋은 일도 있고 단점이 있으면 장점도 있는 법이지 않은가. 공공의 적 알렉스 덕분에 우리 셋은 오히려 더 똘똘 뭉칠 수 있게 되었고, 디뎀과 얄킨은 다행히 나와 생각이 잘 통하고 의리 있고 배려심 있는 친구들이라서 그들과 함께 하는 시간 동안만큼은 행복한 추억을 많이 남길 수 있었다. 내 생일날 그들은 나를 위해 케이크를 준비해 깜짝 축하를 해주었고, 저녁엔 두 시간을 함께 기다려 오로라를 직접 눈과 카메라에 담는 소중한 기회도 잡을 수가 있었다.
혼자 술에 취해 잠에 들었던 그다음 날, 나는 아침부터 숙취에 시달리며 어제의 선택을 후회하고 있었다. 밖엔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이른 시간이었지만 나는 비행기를 타러 공항으로 가야 했다. 디뎀과 얄킨은 공항으로 돌아가는 길까지 히치하이킹으로 가는 것에 성공을 했다고 하는데 혼자 남은 나는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결국 나는 공항버스를 타고 가기로 결정하고 아침 댓바람부터 쓰린 속을 부여잡고 아이슬란드의 칼바람에 맞서 정류장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정류장에 도착하자 하필이면 내가 도착하기 직전에 버스가 출발을 해버려서 다음 버스를 한 시간이나 기다려야 했다. 정류장에 앉아 벌벌 떨고 있자니 알렉스가 옆 침대에 있었어도 따뜻했던 내 침대가 그리워졌다. 간사하게도 '이렇게 밖에 앉아 기다릴 줄 알았으면 30분이라도 더 자고 나오는 건데...'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고 그 책임은 모두 나에게 있다. 오늘의 단맛도, 내일의 짠맛도 결국은 다 내 책임이고 내가 받아들이기 나름인 것이다. 앞으로 닥칠 단맛과 짠맛을 기다리며 나는 그렇게 정류장에 한참을 앉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