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랜서 통번역사로 살아남기 14

언제 보람을 느끼세요?라는 질문이 불러온 폭풍

by 예도하


나는 사랑하나?


지글거리던 제주의 태양이 조금은 누그러진 9월의 어느 날.

과거 나의 영어 선생님이자, 이제는 통대 졸업을 앞둔 동료 선생님을 만나러 제주로 날아갔다.


서로의 근황을 나누던 와중, 그는 갑자기 이런 질문을 던졌다.


“언제 보람을 느끼세요?”


이 질문을 듣는데 갑자기 숨이 턱 막혔다.

일을 하면서 만족감을 느꼈던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 있었던 것 같은데

너무 사람들에게 시달리던 경험을 하고 돌아와서 그런가

보람을 느낀 게 언제였지? 하며 머릿속은 백지로 변했다.


거듭 그 질문을 곱씹으며 제주의 나날을 마치고 돌아왔다.

며칠 뒤 인스타그램을 스크롤하다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하는가?’라는 질문을 보게 되었다.


나는 엉뚱하게도 그 문장을 통번역에 대입해 버렸다.


귀찮음을 이기고 (먼 행사에) 가는 것,

잠을 줄여가며 (용어를) 찾는 것.


덤으로 읽어도 읽어도 끝이 없는 자료 조사까지.


이 모든 걸 왜 하고 있는 걸까?


통번역을 할 때마다 나는 바보가 된다.


평소엔 그럭저럭 영민하게 살아가는 것 같은데

업무가 시작되면 0개 국어 인간이 되어버린다.


“내가 이 일을 왜 한다고 했지?” 하는 회의감이 매번 찾아온다.


그래서 드는 생각은 하나다.


이건 사랑이 아니라 애증 아닌가?


통역 전날이면 긴장해서 잠도 설친다.

배는 뒤틀리고, 소화는 안 되고,

공부는 넘어도 넘어도 넘을 산이 있고,

현장에선 예상치 못한 변수들이 줄줄이 터진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막상 포기도 못 하고, 도망도 못 간다.


행사가 끝나면 늘 이런 식이다.


“최악은 아니었잖아.”

“번역본도 마감 전에 검수 여러 번 했잖아.”

“지난번보다 이 부분은 덜 절었잖아.”

“그래도 도망 안 가고 끝까지 했잖아.”


이런 자조 섞인 칭찬을 스스로에게 건네며 숨을 고른다.


그러다가 아주 가끔

정말 예상치 못한 순간에 날아오는 피드백이 있다.


“이번 번역, 좋았어요.”
"덕분입니다."
“통역 매끄러워서 듣기 편했습니다.”
"어쩜 그렇게 목소리가 좋으시고 영어를 잘하세요?"


그런 말 한마디 한마디에

심장이 또렷하게 다시 뛰기 시작한다.


고생 끝에 잠깐만 솟는 도파민이

나를 또 다음 강을 건너게 떠밀어 넣는다.


그렇다면 나는

통번역을 사랑하는 걸까?


그게 무엇이든

이 일은 나를 바보로 만들고,

지치게 하고,

불안하게 만들고,

그래도 붙잡고 늘어져 포기를 모르게 한다.


사랑이라기엔 너무 고단하고,

미워하기엔 떠나보내기 어렵다.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일도

조금만 더 강을 건너보자며

침대에서 눈을 뜨고 노트북을 켠다.





⛵ 예도하, 오늘도 강을 건너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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