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랜서 통번역사로 살아남기 10

사전 자료가 왜 필요한가요?

by 예도하
통역사는 구글이 아닙니다, 자동 완성 기능도 없어요.


"통역사님, 00월 00일 00시 시간 괜찮으신가요? 온라인 회의 통역 요청드립니다."


인하우스 시절에 받던 통역요청 연락이다.

스케줄만 맞으면 “가능합니다”라고 답하고, 이어 바로 추가하는 말이 있었다.


“원활한 통역을 위해 회의 개요, 참여자 명단, 자료 부탁드립니다.”


통역사라면 프리랜서든 인하우스든 누구나 공감하는 지점.

그렇다. 사전자료.



"통역사님은 말 안 해도 다 아시잖아요."


프리랜서든 인하우스든 통역 업무를 맡다 보면 가장 답답한 순간이 있다.

통역사는 당연히 모든 분야의 배경지식과 전문용어를 알고 있을 거라 ‘가정’하는 것.


통번역사는 위키피디아나 AI가 아니다.

회의에 소환했다고 바로 플레이 버튼을 누르면 회의 주제, 맥락, 참여자, 기술 배경을 줄줄 뱉는 기능은 안 탑재되어 있다.


그리고 제발,
말마따나 회의 내용을 아는 내부 직원에게 갑자기 발표시켜도 버벅거리는 게 회의다.
하물며 처음 보는 자료를 외국어로 전달해야 하는 통역사가 얼마나 버벅거릴지는...

모두가 예측 가능하지 않은가?



센스 있는 요청자는 시작부터 다르다


"신규 사업 확장을 위해 독일 00사 00 부서와 기술 소개 회의 및 질의응답을 합니다.

자료는 금일 3시까지 드리겠습니다. 확인 후 질문 있으시면 회신 부탁드립니다.”


이런 메시지를 받을 때 통역사는 신뢰를 느낀다.


‘아, 이번 회의는 답답하지 않겠구나. 어서 자료 확인하고 기술 용어 정리해야겠다.’


실제로 이런 팀의 회의는 발표도 명확하고, 통역 타이밍도 자연스럽고, 전체 흐름이 훨씬 매끄럽다.



반대로... 자료 없이 “그냥 편하게 오세요”


반대로 자료는 당일까지 준비할 거라 아직 없다, 쉬운 내용이니까 편하게 그냥 오면 된다. 통역할 것 거의 없다고 말한 경우:


급하게 만든 자료로 횡설수설 발표 → 통역 타이밍 안 주고 말 끊기 → 전문 용어 폭주 → 정신적 체력 고갈 & 하드캐리 → 청중 질문 많아짐 → 발표자 두서없이 대답 → 또다시 멘털 붙잡고 통역 → 통역 수고 인사도 없이 회의 종료


이런 흐름으로 흘러갈 확률이 높다.


특히 온라인 회의의 경우
발표자가 보고 발표한 페이지를 통역사가 통역할 때도 비춰줘야 하는데

그런 포인트를 아예 신경 쓰지 않는 경우가 꽤 있어

통역하다 말고 한국어로 "아까 발표하신 것처럼 어디를 비춰주세요."라고 말하기도 한다.


발표자는 본인이 발표하면 된다.

하지만 청중은 통역사의 말로 내용을 이해한다. 이걸 잊는 순간, 회의 전달력이 훅 떨어진다.


결국 통역사 발표가 발표_최종_최종_최종 본. mov

발표자가 두서없이 말하더라도 통역사가 사전자료를 충분히 숙지했다면

오히려 구조화해서 더 간결하게 전달하는 경우도 많다.


이게 통역의 기술이자 전문성이다.


프리랜서가 된 뒤에도 상황은 같다... 오히려 더 심하다?

콘퍼런스 발표자 상당수는 발표 당일까지도 최종본을 넘겨주지 않는다.


“현장에서 드릴게요!”
이 말이 이렇게 무서운 말일 줄이야.


다시 말하지만,
결국 청중은 통역사의 말을 통해 발표를 이해한다.
그 말은, 통역사가 해당 분야 지식의 보고인 발표자만큼은 아니더라도
그 발표에 한해서는 발표자에 근접한 이해도를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즉, 사전자료는 ‘통역사 편의’가 아니라
행사 전체의 품질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다.


전문가일수록 바쁘고, 발표 자료도 마지막 순간까지 다듬는다는 걸 잘 안다.

하지만 발표의 절반은 통역사에게 달려 있다면, 성과를 원하는 만큼만 사전자료가 필요하다.


그건 통역사가 ‘욕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모두가 성공하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그러니, 통역사가 언제 자료를 받을지 전전긍긍하는 일이 조금만 줄어들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 예도하, 오늘도 강을 건너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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