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랜서 통번역사로 살아남기 16

웰컴 투 더 삶 오브 급속 노화

by 예도하


애티튜드 체크라면서, 이것 뭐예요?


한국에 돌아와 많은 행사에 지원하고도 무응답.
서류 단계에서조차 넘어가지 못하는 날들이 반복되던 와중, 드물게 반가운 소식이 하나 들어왔다.


한 공공기관의 성과 발표회 일정에 내 동시통역 지원 서류가 전달되었고,
담당자와 간단한 전화 통화를 하자는 연락이었다.


에이전시를 통해 들은 말은 “공기관이다 보니 태도나 성격을 보려는 것 같다”는 설명.

시험은 아니겠구나 싶어 한숨을 돌렸다.

인하우스 입사도 아니고, 하루 행사인데 굳이 테스트를 보겠나 싶기도 했다.


그렇게 어느 날 오전, 전화 통화 약속을 잡았다.

영상 통화일 것 같아 집이자 오피스인 자취방에서 오피스 룩을 꺼내 입고 화장도 했다.

이력서를 다시 훑으며 그동안 어떤 일을 해왔는지 정리하고 있는데
면접 약속 40여 분 전, 메일 주소를 물어보더니 피피티 하나가 날아왔다.


메일엔 한 줄.

“이따 면접 때 통역할 자료입니다.”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통역 시험이라는 말은 없었고,

단기 행사 지원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남은 시간은 약 40분.

파일을 열어보니 기관 소개, 산업 동향, 관련 법 변화 등이 담긴 자료였다.

이미지와 개괄식 문구를 보며 내용을 빠르게 파악했고,
발표 흐름을 추측하며 입에 영어 단어를 붙이듯 중얼거렸다.


째깍째깍.

시간은 그대로 흘러 약속한 통화 시간이 되었지만 전화도, 영상 통화도 오지 않았다.

혹시 내가 놓친 게 있나 싶어 조심스레 연락을 드리자
“새 메일을 보냈다”라고 했다.


이번엔 새로운 한글 파일이었다.

피피티 캡처본과 한글 스크립트가 번갈아 들어간 자료.

그리고 곧바로 공유된 줌 링크로 접속했다.


인사를 나누자마자 돌아온 말.


“아까 파일 받으셨죠? 그거 통역해 보세요.”

“네?”

“이전 행사 때 쓰인 건데 바로 해보시라고요.”


그렇게 아무 예고도 없이 통역 테스트가 시작됐다.

스크립트 초반엔 여러 부처명, 내부 조직명, 직함들이 빼곡했다.


통역 지원 단계에서는 행사 윤곽을 정확히 알기 어렵다.

보통은 통역사로 확정된 뒤에야 자료를 통해 전체 그림을 알게 된다.


그래서 첫 파일을 열었을 때 ‘아, 이 기관 행사구나’ 정도만 파악했고

발표 내용을 역추적하며 머릿속으로 구조를 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통화 직전에 받은 파일로 바로 통역을 하라니.

(적어도 인하우스 면접이라면 면접 전에 회사 이름이라도 알게 되고, 업계 용어라도 준비하고 가지 않나.)

사전 고지도 없었고, 인사다운 인사도 없이 곧바로 통역을 시작해야 했다.


한국어 피피티와 한국어 스크립트를 번갈아 보며

기관명과 직함을 찾고, 다음 문장을 예측하며 동시에 영어를 내뱉었다.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중간에 통역을 끊고 왜 그렇게 긴장하냐는 질문이 돌아왔다.


솔직히 말해 묻고 싶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누가 안 떨 수 있을까?

한국어로 발표를 시켜도 떨릴 판에,

지금 내가 어떤 페이지를 통역하고 있는지도 확신할 수 없는 상태에서
외국어로 전달하고 있는데.


동시통역이란 건 이렇게 불시에 기계처럼 작동해야 하는 세계인 걸까.


줌 화면 너머에서 진땀을 흘리며 HMH(하면 해)의 정신으로 멱살을 잡고 끌고 갔다.


7페이지쯤에서 통역은 중단됐다.


“정부기관 행사라 용어가 어려워도 바로바로 나와야 한다”는 말과 함께
내부 논의 후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내 귀에는 “다음 기회에”라는 말로 들렸다.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애티튜드 체크 통화라 쓰고,
압박 통역 면접이라 읽는 시간.


너무 기력이 빠져 소파에 그대로 쓰러져 한 시간 반을 잠들었다.


재학생 통역사 대상 행사라 가벼운 통역이라고 요율도 낮게 측정된다고 해

난도가 높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내 예상이 오산이었다.


예고 없는 통역,
태도나 인성을 볼 대화는 없고, 사람 대신 기능을 보려는 방식.


이게 이 세계의 현실인 걸까.

나는 사람이 아니라
통역하는 AI가 되어야 하는 걸까.

나는 AI가 될 수 있는 사람인가.
지금이라도 다른 길을 찾아야 하나.


오전에 통화를 했지만
저녁까지 아직 아무 연락이 없다.


함께 일할 건지,
아니면 새 사람을 찾을 건지조차 알 수 없다.


이 피 말리는 대기 시간이
이 일의 일부라는 게 괴롭다.


서류가 통과될 때마다 매번 시험을 치러야 하는 걸까.

산업도, 성격도, 맥락도 모른 채.


아무래도 이렇게 살면 급속 노화가 올 것 같다.


저속 노화 식단, 노음주, 노담, 건강한 루틴들.

아무 소용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오늘의 나는 강을 건너다 잠시 빠진 것 같다.





⛵ 예도하, 오늘도 강을 건너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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