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부터인가, 무기력이 스며들어 폭삭 젖어버렸다
길고 긴 무기력이 이어지고 있다.
그동안 "좀 쳐진다"는 글을 쓰며
이내 결심하고, 뭐라도 하나씩 다시 해보곤 했는데
작년 12월부터 올해 1월까지는 상태가 조금 달랐다.
자취방에 거의 칩거하듯 지냈다.
누군가와 약속이 잡히거나,
운동을 가는 날에만 집을 나갔다.
그 외에는 집 앞 코너만 돌면 나오는 편의점도 가지 않았고,
1층에 내려가 분리수거나 쓰레기를 버리는 일조차 하지 않았다.
일상이 핸드폰에 갇혀버렸다.
클릭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게 나의 하루였다.
만보기에는 하루 100보 미만, 20보 미만이 찍혔다.
어느 순간
이건 단순히 “좀 많이 피곤한 상태”는 아니라는 생각이 스쳤다.
수면 패턴도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
예전에는 자정 무렵 잠들어 7시 반쯤 일어나는 생활이었는데,
요즘은 새벽 4시 반에 잠들어 정오가 지나서야 눈을 떴다.
집안 청소는 하지 않았고, 분리수거도 미뤄졌다.
그나마 운동이라도 가는 날에는
밖에 나가야 했고, 운동복을 세탁해야 하니 뭐라도 하긴 했다.
그런데 얼마 전 무릎 통증으로 정형외과에 갔더니
양쪽 무릎 모두 염증이 있고 물도 차 있다며 당분간 운동을 금지하라고 했다.
그 이후로는 정말 아무 이유 없이 집 안에만 머무는 날들이 이어졌다.
점심 무렵에 일어나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오후 내내 멍하게 소파에 앉아 있거나 침대에 누워 있었다.
저녁이 되어서야 조금 정신이 돌아와
책을 몇 장 넘기거나 언어 공부를 조금 했다.
12시 반쯤 침대에 눕지만 새벽 3시 반에서 4시 반쯤이 되어야 겨우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멍한 하루가 반복됐다.
12월에는 앞으로 뭘 먹고살아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걱정이 꼬리를 물며 불면이 시작됐다.
그때는 깨어 있는 동안에도 불안이 심했고
손에 안 잡혀도 “뭐라도 해야 해”라는 마음이 컸다.
그런데 1월이 되자
미래 불안보다도 뇌가 제 기능을 못 하는 것처럼
멍하고, 느슨하고, 헐렁해진 기분이 들었다.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브런치든 블로그든 글을 올리는 행위 자체가 너무 버겁고 오래 걸렸다.
작년에 달력 챌린지를 만들어 매달 그림을 그리고
12월에 달력 인쇄까지 마쳤다.
가족과 친구들에게 보내야 했는데, 봉투를 사러 다이소에 가는 것도,
소포를 부치러 편의점이나 우체국에 가는 것도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따끈따끈해야 할 2026년 달력은 한 달 넘게 책상 아래에서 그대로 식어가고 있었다.
약속이 없는 날에는 하루 종일 육성으로 말을 내뱉지 않았다.
내가 하루 종일 하는 일이라곤 영상이나 음악으로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 것뿐이었다.
생각할 힘이 빠져나간 느낌이 들었다.
일이 없을 때 미리 해두자고 다짐했던 것들이 떠오를 때마다
머리가 아팠고 급속도로 피곤해졌다.
결국 다시 침대로 돌아가 졸았다가 깼다가를 반복했다.
너무 멍해져서 처음으로 핸드폰 게임을 깔아봤다.
바닷속에 물고기를 키우는 게임이었다.
며칠 동안은 눈뜨자마자 잠들 때까지 핸드폰만 붙잡고 있었다.
차라리 이게 잡생각을 덜 하게 해주는 건가 싶어서.
하지만 그것도 일주일쯤 지나니 시큰둥해졌다.
원래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는데,
캐나다에서의 험난한 생활을 겪으며 혼술을 시작해 이어졌다.
머리가 아프거나 빨리 잠들고 싶어서 집에서 술을 마셨고,
야식도 거의 먹지 않던 사람이 혈당 스파이크의 힘을 빌어 잠들어 보겠다고
자정 가까이에 간식을 먹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제, 유튜브에서 무기력에 관한 콘텐츠를 보았다.
힘들 때 내 상황을 정확히 말하는 콘텐츠는 보통 피하곤 했는데
어제는 이상하게 클릭하게 됐다.
정신과 의사는 말했다.
무기력은 우울, 불안, 번아웃 같은 여러 원인이 얽혀 있고,
그래서 쉽게 나아지지 않는다고.
그리고 무기력을 악화시키는 생활 패턴을 설명했는데
그 모든 게 요즘의 내 모습이었다.
무너진 수면과 기상 시간
게임, 영상, 술, 간식 같은 강한 자극
고립
움직이지 않음
해야 할 일이 떠오르는 순간 너무 피곤해져서
아무것도 못 하는 모습까지!
특히, 통제력을 잃은 완벽주의자에게
무기력이 더 쉽게 찾아온다는 말이
정확히 나를 관통했다.
"내가 지금 무기력 상태구나."
주위를 둘러보니 집안은 엉망이었고,
내가 얼마나 오래 집 밖을 나가지 못했는지도 실감이 났다.
회복에는 오랜 시간과 여러 방법이 필요하다고 했다.
약물 치료, 그리고 자신의 상황을 이해해 주는
다정한 사람에게 의지하는 것.
연고 없는 지역에서 자취하며,
여러 이유로 가족을 만나기 힘든 내게는
씁쓸한 처방이었다.
결국 혼자서라도, 더 오래 걸리더라도,
무언가를 해야 했다.
부모, 연인, 가족, 친구가 곁에 있는 사람들이 부러워졌다.
왜 나는 또 혼자일까, 이런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왜 이 혹독한 계절은 나에게 또 이런 시련을 주는 걸까 모든 게 원망스러웠다.
스스로를 갉아먹는 생각은 언제나 가장 빠르게 먹이를 찾아낸다.
발끝에 드리워진 그림자처럼 언제나 잠식할 틈을 노리고 있다.
그래서
저녁 배달 생각을 취소했다.
혼술도, 야식도 멀리하기로 했다.
쇼츠와 게임도 낮과 자기 직전에 손대지 않기로 했다.
아주 작은 행동이라도 해보자 싶어서
과슈 물감과 붓, 스케치북을 꺼냈다.
얼마 만에 만지는 그림 도구인지.
뭘 그려야 할지 생각하다가
그 고민조차 에너지를 갉아먹는다는 걸 떠올렸다.
그냥 사진첩에서 맛있었던 음식 사진 하나를 골라 스케치 없이 바로 색을 올렸다.
음식 몇 개를 그리니 두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물감 냄새, 붓의 감각, 스케치북의 촉감이 좋았다.
“기분이 좋다”는 감각을 오랜만에 느꼈다.
더 하면 지칠 것 같아 도구를 씻고, 닦고,
원래 있던 선반에 다시 넣었다.
무기력한 상태에서는 꺼내고, 정리하고, 제자리에 두는 일조차 버거운 일이다.
여기까지 한 것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루 작은 행동으로 무기력이 나아질까.
절대 아니다.
어제도 결국 새벽 4시 가까이에 잠들었고
오늘도 12시가 넘어 눈을 떴다.
그래도 조금 달라진 게 있다면,
눈을 뜨자마자 샤워를 했고,
점심을 요리해 먹었고,
소파에 누워 있다가
영어 기사를 3편 읽고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는 것.
이 글을 발행할지 말지는 아직 모르겠다.
다만, 어디라도 솔직하게 터놓아야 한다는 건 알고 있다.
발행한다면 이 문장도 빼지 않고 그대로 올릴 것이다.
이 계절이 지나가길 기다리기보다
이 계절 안에서 살아 있는 법을
다시 배우는 중이라고 생각하며.
⛵ 예도하, 오늘도 강을 건너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