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랜서 통번역사로 살아남기 22

안 흔들리려고 하지만, 흔들린다.

by 예도하

결국 어제 봤던 면접은 떨어진 것으로 판명 났다.

에이전시들이 조금만 더 상냥하면 좋을 텐데.

통역사 선정·비선정에 대한 답이 없으니 언제 결과를 알 수 있는지도 모르겠고,
혹시 확정일 수도 있으니 날짜가 겹치는 다른 행사에도 지원을 못 한다.

지원할 때마다 이렇게 전전긍긍 마음을 졸인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담당자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확정 여부를 언제 알 수 있는지, 떨어졌다면 겹치는 다른 행사에 지원해도 되는지.

오전 내내 답은 없었다.

핸드폰 화면만 보다 지친 나는 영어 라디오를 틀어놓고 그대로 잠에 들었다.


꿈을 꿨다.


“그런 실력으로 통역사라고 할 수 있겠어요?”


이도 저도 아닌 통역사라는 말을 들으며 영영 일을 할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비난에 시달리는 꿈이었다.


식은땀을 흘리며 눈을 뜨니 정오가 훌쩍 넘은 시간.
이상하게도 이렇게 진이 빠진 채 잠들면 악몽을 꾸거나 가위에 눌리곤 한다.


대학원 시절에도 그랬다.

과제를 하다 잠깐 눈을 붙이면 늪에 빠지듯 잠들어 그대로 가위에 눌렸다.

이 일이 뭐라고, 나는 아직도 이걸 놓지 못하는 걸까.


머리로는 안다.
그 클라이언트와 인연이 아니었을 수도 있고,
내 자리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려 해도 ‘내가 부족해서’, ‘내가 못나서’라는 마음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다.

그 생각이 터지기 직전이 되면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번역 에이전시에서 정기적으로 받는 일감도 없다.


샘플 번역을 몇 차례 치렀지만 결과를 알려주지 않거나,
합격했어도 단가가 맞지 않거나,
풀에 등록됐지만 1, 2년 넘게 아무 일도 없는 경우도 있었다.


번역 업계의 단가는 10년 전보다 나아지지 않았고,

때로는 오히려 더 낮아졌다.


의학처럼 전문성이 필요한 분야조차 테스트를 합격하고 요율 협의를 하려는데

이미 요율이 정해있다고 말하면서 일반 분야 단가로 부르는 곳도 많이 있다.


거절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코가 석자인데 이 단가라도 해야 하나,

그런데 누군가 이 단가로 일을 시작하면 이 시장은 또 그대로일 텐데—
생각은 끝없이 꼬리를 문다.

결국 전문 분야에 적은 단가를 부른 곳들과 거기서 멈췄지만.


오전에 이야기했던 행사는 그렇게 안녕을 고했고,

어제저녁 연락이 왔던 다른 업체의 순차 통역 결과도 문의를 남겼다.

미팅은 9월 4일, 바로 내일인데 3일 오전까지도 선정·비선정 답이 없었다.


에이전시 대표는 클라이언트가 아예 연락을 끊은 것 같다고 했다.
통역은 서비스 제공의 일이라 이렇게 고용 자체가 사라지는 일도 생긴다고.

9월에 지원한 20개가 넘는 행사 중
이력서가 전달된 건 네 개, 그중 세 개는 취소 혹은 비선정.

남은 하나 행사는 대표의 해외 출장이 끝나야 확정 여부가 확인 가능하다고 했다.


“9월엔 일이 없을 수도 있겠구나”
결국 마음을 비우기로 했다.


다시 침대로 기어가려는 찰나, 친한 동생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요즘 괜찮아?
흑... 인생이 쉽지 않아.
일이 잡힐 듯하다가 멀어지고...
나는 왜 여기 혼자 이러고 있나 싶어.
동굴 모드야?
프리랜서 삶이 쉽지 않지.
그래도 안 잡힐 듯하다가 잡히기도 하잖아.
운동을 다시 나와라.
그래... 한국 돌아와서 계속 안 나가고 있었네.
등록이라도 하러 나가고 디저트라도 사 먹어.
알겠어. 오늘은 밖에라도 나가볼게.


맞다.
상황을 단번에 바꿀 수 없다면
지금 바꿀 수 있는 건 나밖에 없다.

이불을 박차고 점심을 해먹으러 일어났다.

다행히 어제 야채와 우삼겹, 전자레인지 용기를 주문해 두었었다.

박스를 열고 용기를 씻고 채소와 고기를 다듬었다.

더 거창한 요리는 못 했지만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조용한 집에서 아무 영상도 틀지 않고 밥을 먹었다.


“그래, 운동 등록하고 도서관이든 카페든 가서
자료를 정리하든, 이코노미스트를 읽든,
책을 한 페이지라도 넘기자.”


요리를 먹고, 설거지를 하고,
오랜만에 향이 좋은 바디워시를 꺼내 쓰고,
뉴욕 여행에서 샀던 캡모자를 쓰며 밖에 나갈 준비를 했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혹시, 000 번역가님이세요?”




⛵ 예도하, 오늘도 강을 건너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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