쎄한 느낌은 언제나 틀리지 않더라
“혹시, 000 번역가님이세요?”
“네, 맞습니다. 실례지만 어디서 전화 주셨죠?”
“아, 000 회사인데요. 공개된 이력서를 보고 연락드렸어요.
유튜브 영상 자막 업체인데, 저희 일에 딱 맞는 분인 것 같아서요.”
전화를 준 사람은 유튜브 영상 자막 번역 업체의 대표였다.
유튜브 자막은 해본 적 없는 분야였고,
마침 일이 뜸하던 시기라 솔깃한 전화이기도 했다.
대표는 아이돌 자체 콘텐츠나 공공기관 영상 자막을 번역하는 업체라며
원래 혼자 일하다가 작업량이 늘어
해외 경험이 있는 소수의 번역가와만 함께하고 있다고 했다.
곧 해외 법인도 낼 예정이라며, 회사 이야기를 꽤 길게 늘어놓았다.
내 경력과 해외 생활을 유심히 보았다며
“딱 찾던 사람”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알맹이 없는 내용에 크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며 듣고 있었다.
하지만 통화 내내 이상하게 중요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작업량, 납기,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요율.
결국 예상했던 대로 요율은 낮았다.
유튜브 콘텐츠 특성상 일이 갑자기 생기고, 갑자기 마감이 잡히는 구조라고 했다.
“그때그때 시간이 되는 분께 맡길 거예요.
모든 일을 다 하실 필요는 없어요.”
통화 초반부터 묘하게 쎄한 기분이 들었지만,
나도 일이 없는 시기였고 용돈 벌이 정도라면 해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아, 그런데 샘플 테스트를 하나 하셔야 해요.
여기 링크 들어가서 번역해서 메일로 보내주세요.
경력도 좋으시니까 금방 하실 거예요.”
아? 프리랜서 제안을 먼저 해놓고도 샘플 테스트를 요구하는구나 싶었지만,
아이돌 예능 프로그램 일부를 한–영 번역해 보내자
곧바로 통과 메일이 왔다.
회사에서 사용하는 자막 프로그램이
윈도우에서만 가능하다고 해서
VMware를 설치해 윈도우도 깔고, 가이드도 미리 확인해 두었다.
“그럼 작업물 들어오면 바로 연락드릴게요.”
그러던 중, 3일간 이어지는 통역 행사가 잡혔다.
서울, 인천, 화성을 오가며 빡빡한 일정이었다.
마지막 날, 화성에서 통역을 하고 있는데
대표의 부재중 전화가 찍혀 있었다.
잠깐 쉬는 틈에
“지금은 업무 중이라, 끝나고 8시 이후에 연락드리겠습니다.”
라고 문자를 남겼다.
다시 통역을 마치고,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밤거리로 나와
지친 몸을 이끌고 버스를 타러 가는 길.
휴대폰을 확인하니 메시지가 여러 개 와 있었다.
“연락했을 때 1시간 내로 답이 없는 분은
저희 회사 인재상과 맞지 않습니다.
더 이상 함께 일하지 않겠습니다.
공유드린 자료는 모두 삭제해 주세요.”
너무 당황스러웠다.
연락을 피한 것도 아니었고,
업무 중임을 설명했고,
구체적인 시간까지 전달했는데.
갑작스러운 급발진처럼 느껴졌다.
처음 통화할 때부터 들었던 그 쎄한 기분.
괜히 일을 시작했다가 더 큰 낭패를 볼까 걱정했는데,
차라리 시작 전에 정리된 게 다행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22화를 읽고
“드디어 뭔가 좋은 일이 생기려나?”
하고 기대한 독자도 있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현실은 늘 이렇게,
조금 더 차갑고, 조금 더 복잡하고 덜 친절하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것이다.
매번 느끼지만 첫 만남과 대화에서 드는 쎄한 감각은
나를 배신한 적이 없다.
반대로 무난하게 흘러간 경우엔 클라이언트의 태도도 좋았고,
업무도 자연스럽게 흘러 대체로 기분 좋게 마무리되었다.
목구멍이 포도청일 때, 잠재적인 리스크가 보여도
일을 안고 갈지, 거절할지.
이 선택의 갈림길 앞에 서는 것.
그게 프리랜서로 살아간다는 일인 것 같다.
⛵ 예도하, 오늘도 강을 건너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