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쓰는 사람이라서
삶이 기록이 되고, 다시 기록이 삶이 된다는 것
언어에 관한 일을 하다 보니
글자와 말은 나와 가장 오래 붙어 있는 친구가 된다.
화자의 의도를 가능한 한 정확한 문장으로 옮기려 애쓰다 보면
결국 글도 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된다.
4~5월, 미지의 세계로 떠날 계획을 세워두고
그전에 신작 하나를 들고 가고 싶다고 계속 생각했다.
소설이든 시집이든,
새로운 것을 준비하고 싶었지만
기력이 없으니 아이디어는 떠오르지 않았다.
답답한 하루하루.
그러다 문득,
없는 것을 만들려고 애쓰기보다
이미 있는 글에서 시작해 보자고 결심했다.
작년 가을, 좋은 기회로
20일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출장을 다녀왔다.
10일 동안 박람회장에서 통역과 B2C 영업을 하고,
업무가 끝난 뒤에는 일주일 정도 혼자 여행을 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3–5시간이면 프랑스로 넘어갈 수 있지만
그때의 나는 관광객이 아니었다.
체력을 아껴야 했고, 생각도 많았다.
그래서 프랑크푸르트를 거점으로 삼고
장박 하며 주변 소도시들을 천천히 돌았다.
여행을 가면 그 여행에서만 쓸 작은 노트 한 권을 챙긴다.
(이번엔 독일에서 친해진 E가 선물해 준 명화 노트였다.)
일기는 한 줄이어도 좋고, 빽빽해도 좋다.
티켓과 팸플릿을 스크랩하고,
풍경과 사람, 맛있게 먹은 음식을 그려 넣는다.
그렇게 나만의 여행기 한 권을 만든다.
돌아와 일상을 살다가 가끔 그 노트를 펼치면
사진과는 또 다른 결로 기억이 되살아난다.
그래서 생각했다.
가장 최근에, 가장 가까웠던 그 기록에서
다시 시작해 보자고.
요즘은 매일 아침 7시에 일어나
8시부터 9시까지 한 시간 글을 쓴다.
번역가이자 작가인 동료와 구글 미트를 켜두고 각자의 할 일을 한다.
말은 없지만 같은 화면 안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하다.
오후에는 카페로 나와
아침에 다 쓰지 못한 부분을 마무리한다.
2주를 꽉 채워 매일 적었다.
생각보다 더 활기를 일상에 불어넣는 루틴이다.
죽이든 밥이든 일단 한자라도 쓰며 하루를 시작하기.
설 연휴 동안 기분 좋은 일로 마음이 어수선해졌지만
2월 말까지는 표지와 내지를 디자인해
샘플 책 형태까지 만들어야 한다.
어제저녁 온라인 책 모임에서
각자 진행 상황과 고민을 나누던 중,
대구에서 북카페를 운영하며 독립출판을 하는 한 작가님이 말했다.
“출판은 돈을 보는 일이 아니라,
꿈을 파는 일 같아요.”
웃기면서도 뼈를 맞는 말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일들은 대체로 그렇다.
현실적인 수익을 계산하기보다
보이지 않는 가능성과 감정을 먼저 믿는다.
그래서 스스로를 부정하기도 했지만,
요즘은 이렇게 생각한다.
그렇게 태어난 사람은
그렇게 살아야 하지 않겠냐고.
부정하다가 아까운 시간을 흘러 보내지 말고
지금 할 수 있는 걸 해야지라고 생각한다.
올해 목표는 하나다.
끝까지 파고들어 보는 것.
이런 말을 스스로에게 할 수 있다는 건
기력이 조금 돌아왔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어떤 강을 건너게 될지 여전히 두렵지만,
이상하게도,
이번에는 기분 좋은 떨림이 먼저다.
삶이 기록이 되고
다시 기록이 삶이 되는 시간.
그 시작에 서 있다.
⛵ 예도하, 오늘도 강을 건너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