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역사는 통역만 하는 사람일까
통역사가 살아남기 위한 도구
통번역사는 늘 말과 글 사이의 행간을 읽는다.
발화되지 않은 의도, 말끝의 온도, 미묘한 뉘앙스.
그래서 가끔은
“아, 이래서 통번역사의 직감이 무섭구나”
싶은 순간을 맞닥뜨린다.
이번 이야기도 그런 경험 중 하나다.
프리랜서 생활을 다시 시작하고
4n번 지원하고, 4n번 탈락을 경험하던 와중에
정말 감사하게도 3일간 순차·수행 통역 기회가 들어왔다.
헤어·미용 산업 분야 번역은 해본 적 있었지만 통역은 처음이었다.
인천, 서울, 수원, 화성을 누비며 워크숍, 강연, 모델 시연까지 포함된 일정.
낯설고, 조금은 설레는 도전이었다.
행사 전날,
한국 측 대표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방한하는 디렉터가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지,
이번 행사가 얼마나 의미 있는 자리인지
하나하나 설명하셨다.
그리고 마지막에 덧붙인 한 마디.
“통역사가 눈에 띄어서는 안 됩니다.”
통역사는 눈에 띄지 않는다.
그건 우리 업계의 기본이다.
통역은 양측이 마치 직접 대화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흐르게 만드는 일이다.
번역 역시 작가와 독자 사이에서
번역가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그날 그 문장은
조금 다르게 들렸다.
‘눈에 띄지 않되, 모든 걸 다 신경 써라.’
말은 짧았지만
그 안에는 다른 요구들이 함께 실려 있는 듯했다.
그 순간 직감했다.
이번 통역은 콘텐츠 난이도보다
그 외의 것들에 더 신경을 써야 하겠구나.
그래서 준비를 단단히 했다.
먼저, 의상.
통역사는 보통 흰색, 검정, 네이비, 베이지처럼
존재감을 낮추는 색을 선택한다.
이번엔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정으로 맞췄다.
통역 퍼포먼스 외의 요소로
어떤 피드백도 받고 싶지 않았다.
기본 준비물도 챙겼다.
통역 노트, 여분 필기구, 노트북,
머리 고무줄, 치약·칫솔, 비타민.
그리고 추가 준비물.
식사 시간이 없을 가능성을 대비한 초콜릿.
긴장과 눈치 속에서 소화가 안 될 가능성을 대비한 소화제.
나는 물만 마셔도 체하는 체질이다.
그날은 물조차 긴장 속에서 마셔야 할 것 같았다.
이른 아침,
인천으로 향하는 지하철에 몸을 맡겼다.
통역사는 통역만 하는 사람일까.
말을 옮기는 사람인 동시에
공기와 눈치를 읽는 사람,
보이지 않는 균형을 유지하는 사람.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을 최대한 지우면서도
가장 예민하게 살아 있어야 하는 사람.
그날, 나는
말보다 더 많은 것을 통역하게 될 것이라는 예감을 안고
흔들리는 차장 밖
인천으로 가는 낯선 풍경을 보며
행사장으로 향했다.
⛵ 예도하, 오늘도 강을 건너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