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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도르노 Apr 14. 2022

윤이상, 이제는 음악을 기억할 때

정치가 아닌 음악에 집중해보는 시간


윤이상(1917~1995)


어느 날 문득 윤이상 하면 ‘정치'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내 마음속의 윤이상은 ‘정치적 사건에 휘말려 마지막까지 한국 땅을 밟지 못한 음악가'로 정의되어 있었다. 이젠 그동안 배워왔던 교과서 같은 설명 말고 흥미롭게 다가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대 유럽 5대 작곡가’라는 타이틀보다 스트라빈스키, 카라얀, 슈톡하우젠, 리게티 같은 '세계적인 음악가들이 옥살이하던 윤이상을 위해 한국 정부에 탄원서를 제출했다는 사실'이 더 깊이 다가오는 것처럼.


당시 대가들이 왜 그렇게 윤이상 음악에 열광했을까. 20세기 당시에는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변화하는 흐름이 있었고 새로움에 대한 가치가 변화했다. 모더니즘이 독창적인 새로움을 추구했다면, 포스트모더니즘 시기에는 다양성과 다원주의라는 키워드가 중요하게 떠오르면서 ‘독창성'이라는 것이 미적 척도로서 의미를 상실하게 된 것이다. 자연스레 서양의 음악가들은 옛 음악 양식이나 낯설고 이국적인 것을 작품에 적용하게 되었고 동양의 오리엔탈리즘적 특징들과 이국적 색채들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과 ‘동아시아 음악과 유럽 음악의 융합’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윤이상의 독특한 작곡 방식이 맞물려서 거장들이 더 환호했던 것이다.


작곡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서양과 동양의 조화에 대해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그런 음악을 만들어보려 시도해 보면 서양과 동양은 음 체계부터 달라 어렵게 느껴진다. 윤이상은 이런 어려움 속에서 성공적으로 조화를 이루어냈다. 그는 동양음악의 특성을 도교의 관점에서 이해하며 동양과 서양의 음악 차이에 대해 한 강의에서 이렇게 요약했다.

“서구의 음악에서는 작품에 더 중심을 두고 있고, 동양음악은 직관에 의해 이루어지며 음들은 갖가지 채색과 장식에 의해 만들어진다. 서구는 구조와 형식을, 동양은 근본적인 음악의 생명력을 강조한다.”

우리는 여기서 누가 만든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생겨난 민요와 노동요를 떠올릴 수 있다. 윤이상 음악의 특징인 ‘주요음기법'을 설명했던 말에서도 비슷한 이미지가 떠오른다.

“주요음은 하나의 넓은 곡선을 그린다. 우선 우리의 청각적 안정을 정해주는 것은 주요음들이다. 이들은 선율적인 장식들로 인해 풍요로워지고, 그럼으로써 긴장의 요소들과 생동감의 요소들이 강해진다. 그러나 길게 지속되는 음 자신도 생명 요소를 지닌다.”  

필자는 이 설명들을 포함한 윤이상의 음악에서 떠는소리, 흘러내리는 소리, 구르는 소리 등의 '시김새'를 떠올리곤 한다. 어렸을 때 들으면서 자랐던 민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형식적인 설명이 마음속 깊이 이해되는 순간이다.


윤이상이 이렇게 한국음악적 요소에 집중한 것은 단지 어린 시절의 경험 때문만은 아니다. 윤이상은 당시 한국음악이 서양음악에 의존하고 있고 한국음악의 이념도 확립하지 않은 채 모방에 그치고 있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문제의 돌파구는 '한국음악의 정체성'이며, '한국 작품'을 외면하고 있는 것은 시대적인 역사인식의 결여라고 보고 이를 크게 비판했다. 또한 한민족의 고유한 생활감정이 독특한 호흡이자 민족적 개성이기 때문에 한국 민족으로서의 자각이 있어야 하고, 전통과의 많은 대화를 통해 섬세한 미의식이 획득되어 한국음악의 수립이 비로소 열릴 수 있다고 보았다. 이렇게 냉철하게 당시의 음악계를 바라본 윤이상은 한국음악적인 요소에 더 집중했고 한국음악의 발전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던 인물이다.


윤이상은 본인의 음악을 연주할 때 셈여림을 정확하게 지켜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양하며 역동적인 구조들과 힘을 가졌으면서도 신축성 있게 조형된 선들이 본인의 음악적 특징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꺾는소리가 앞에서 꺾여야 하는데 뒤에서 꺾이지는 않는지 주의 깊게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감상 포인트를 가진 윤이상의 음악을 처음 들어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처음으로 '예악'감상을 추천한다. 5분 정도밖에 되지 않아 감상에 부담이 없고 종묘제례악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사극에 나올법한 웅장함을 생각한다면 큰 재미로 다가올 수 있다. 더불어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곡은 '피리'이다. 오보에 독주곡이지만 진짜 피리 같다는 인상을 느낄 수 있다. 앞서 말한 떠는 소리나 꺾는소리의 포인트를 찾으며 감상한다면 큰 재미로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


요즘은 윤이상의 음악이 곳곳에서 연주되고 통영에 윤이상 기념관도 있을 만큼 관심이 높아졌다. 비교적 최신이긴 하지만 관련 논문도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서양에 비해, 심지어 북한에 비해서도 너무 늦게 주목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정치적 사건으로 주목되었던 이유에서인지 사람들은 모두 정치적 시선으로 바라보곤 한다. 가장 빠르게 알려질 수 있는 TV 방송에서 다루기에도 조심스러운 듯한 느낌이다. 정치적 사건에 대해 옳다 그르다를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단지 음악 하나만으로도 매우 의미 있고 공부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남기고 싶다. 이제 '윤이상'하면 북한과 정치가 아닌 동양음악 혹은 한국음악이라는 키워드가 먼저 떠올랐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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