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음악으로의 길목을 친절하게 비춰주다.
'음악'과 '사물'하면 어떤 사물이 떠오르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악기를 떠올리지 않을까? 하지만 저자는 넓은 의미의 사물을 지칭했다는 듯 악보 그 자체에 대해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악보가 말하지 않는 것
똑같은 악보인데 연주자마다 음악이 달라지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악보를 완벽히 구현한 연주가 완벽한 연주일까? 그렇다면 어떤 연주자는 완벽히 재현하고 어떤 연주자는 제멋대로 재현하여 음악이 다르게 연주되는 것인가? 악보가 정답인가, 연주가 정답인가? 음악 작품은 대체 무엇이며, 그건 어디에 있을까.
어쩌면 우리는 무의식 중에서 이런 질문들을 삼키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모른척하고 감상한다면 즐거운 음악이 될 테지만, 이런 질문들을 계속해서 되뇌다 보면 끝없는 의문 속에 빠져들게 될 테니까. 그러나 저자는 외면하고 싶었던 의문들을 붙잡는다. 그리고 이 의문의 흔적을 찾아 기록하고 있다.
무너지는 다섯 개의 선
알반 베르크는 오선 자체를 지웠고, 에릭사티는 박자표와 마디선을 지워버렸다. 그러자 음표들은 틀 밖에서 유영하기 시작했다. 쇤베르크는 음정이 딱히 정확하지 않아도 되는 음악을 만들었고, 슈톡하우젠은 악보들을 잘라서 이리저리 흩뿌려놓았다. 음악이 무엇인지 끝없이 질문을 던지다가 답답했던 것일까. 대가들은 기존에 있던 것을 재조정하거나 없애면서 악보에서 점점 벗어나고 있었다.
이젠 음표나 오선이 없어도 된다. 악보는 이제 암호가 아니라 작곡가 자신들의 생각을 더 효율적으로(더 마음대로) 표현할 수 있는 도화지가 되었다. 기존의 문자 같은 악보는 읽으면 어떤 멜로디인지 상상할 수 있었지만, 우리는 이제 이 그래픽 악보를 보고 어떤 소리를 낼지 구체적으로 떠올릴 수 없게 되었다. 그래픽 악보는 '작품'이라는 개념을 세차게 흔들었다.
듣는 음악에서 읽는 음악으로
그림 같은 악보에서 놀라기에는 아직 이르다. 책을 만들어놓고 음악을 '읽기'를 요구한 작업이 있다. 음악을 읽는다는 것이 가능할까? 저자는 여기서 디터 슈네벨의 '모-노'를 소개한다. 음악을 읽는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조차 아리송하다. 오선보를 보고 음을 상상하는 것도 음악을 읽는 것일까? '빠르게', '조금 빠르게', '노래하듯이'라는 말을 보고 분위기를 상상하는 것도 음악을 읽는 것일까? '모-노'는 우리가 이제껏 음악이라 불러왔던 대상으로부터 멀찍이 나아간다.
스스로 연주하는 악기의 탄생
이제 정말 사물이라고 할법한 주제가 등장한다. 자동 악기는 생각보다 오래전부터 탄생하기 시작했고(물론 매우 거대하고 거추장스러웠지만), 이때부터 인간과 악기가 맺어 왔던 '연주'라는 공고한 관계에 작은 균열이 생겼다. 이런 기계 장치의 발명은 음악을 실현시키는 매개자가 꼭 인간일 필요는 없다는 암묵적 합의로부터 출발한다.
자동 피아노를 위한 연습곡
연습곡은 연주자뿐만 아니라 특정 악기와 단단히 엮여있다. 그 악기에서 뽑아낼 수 있는 수많은 경우의 수를 탐구한다. 자동 피아노로 만든 연습곡은 어떤 경우의 수를 탐구한 것일까. 저자는 다양한 곡을 소개하며 독자에게 설명해 준다. 자동 피아노는 작곡가들이 연주자를 거치지 않고 자신의 음악을 실험해 볼 수 있는 유용한 연습 창구가 되기에 충분했다.
소리를 재생하는 기계
녹음이 개발된 초기에는 음반에 잡음, 노이즈가 가득했다. 이 노이즈들을 제거하려고 연구를 거치며 점점 또렷한 음질로 음악을 감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음반이 팔리기 시작했던 초기에는 실황이 원본이고 음악이 사본이었다. 하지만 점점 좋아진 음질은 음반을 '원본'의 자리에 올려놓았고, 실황과 음반은 음악의 두 존재 형식으로 자리매김했다. 연주자들은 실황을 위한 연주와 음원을 위한 연주에 다르게 적응하여 연주하게 되었다.
예술 형식으로서 음반
또렷한 음반을 목표로 연구했던 옛날과는 다르게 옛날 느낌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1930년대 음반을 들으며 그 시대의 노이즈를 즐기는 사람도 있는 한편, '로파이 음악'을 즐겨 들으며 고의로 제작된 노이즈를 즐겨 듣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이 현상을 "기술의 진보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이 세대의 무력함"이라고 하고, 저자는 '충실도 아래에서 펼쳐져 왔던 기술의 진보가 어찌나 무력한지를 받아들인 것에 더 가까워 보이기도 한다'라고 말한다.
소리의 오브제, 구체 음악
구체음악은 어떠한 실제 소리를 녹음해서 가공해 음악으로 만드는 것이다. 연주자의 연주가 아니라 새소리, 물소리와 같은 가공되지 않은 소리를 녹음하고 가공하는 것이다. 구체음악은 기존 음악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도, 완전히 흡수될 수도 없는 모순적인 상태로 음악과 묘하게 엉켜있다.
현대음악을 접할 때 가장 처음에 접하는 분야 중에 하나인데 이 책에서는 가장 마지막 챕터에 등장한다. 이러한 점에서 현대음악이 되기까지의 길을 차근차근 짚어주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보통 현대음악을 처음 접하게 되면 거부감이 들기 마련인데, 이 책을 읽게 되면 그 공포감이 조금은 덜하게 되지 않을까?
음악에서 비롯했으나, 음악의 도구에서 벗어나, 음악의 가능성을 발견한 사물들.
악보, 자동악기, 음반.
음악과 가장 가까운 이 사물들은 음악의 과거를 어떻게 기록하고,
음악의 미래를 어떻게 점치고 있었을까.
책 표지 뒷면에 쓰여있는 문장이다. 구매할 때만 해도 아무 생각 없던 문장이었는데 책을 완독 한 지금은 현대음악의 시작점이 된 질문 중 하나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과거였던 그때보다 기계가 더 발달한 지금 더 깊게 고민해봐야 할 문제가 아닐까.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