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용소와 음악 - 이경분
내가 종종 생각했던 것. 음악은 양면적이다.
어떤 부분에서 양면적이냐고? 그것의 아름다움은 나를 즐겁게 해 주지만, 그것의 광활함은 나 자신을 하찮게 느껴지게 한다는 점. 답이 정해져 있지만 사실은 답이 없다는 점도. 되게 싫기도 한데 되게 좋기도 한 요물.
그리고 난 이 책을 읽은 후 마음속 음악의 양면성에 대해 한 줄 더 추가해야만 했다.
'죄 없는 포로들에게도 위로를 주지만 그들을 죽이는 살인자들에게도 위로를 준다는 점'
SS가 음악을 들으면, 특히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 인간 비슷한 존재로 변하기 시작한다. 목소리는 평소의 쉰 목소리가 아니고, 사근사근하게 된다. (...) 때로는 어떤 선율이 그와 가까운 사람을 생각나게 하면 (...) 눈에는 안개 같은 것이, 인간의 눈물과 비슷한 것이 보인다. (...) 음악을 너무 사랑하여 울 수 있는 인간이 동시에 그 끔찍한 일을 다른 인간에게 할 수 있을까? 그렇다. 쉽게 믿을 순 없겠지만. - 시몬락스
<3. 아우슈비츠의 음악> 중 일부 발췌.
[수용소와 음악]에서는 세 수용소를 소개한다. 어떤 수용소는 '거짓 공장'이었고, 어떤 수용소는 '살인공장', 끊임없이 이어지는 '희생자들의 행렬'이었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각 수용소에는 오케스트라가 존재했고, 가해자(나치)들은 오케스트라에 지원을 (비교적) 아끼지 않았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수용소 내에서 많은 음악이 작곡되기도 하고, 연주되기도 했다. 각 수용소마다 특징이 있지만 가장 큰 공통점은 어찌 되었건 음악이 수감자들에게 위로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음악 연주는 위로이자 생존이었다. 잠깐이나마 끔찍한 현실을 잊게 해주기도 하고, 음악을 연주함으로써 노동에서 벗어날 수 있는 수용소도 있었으니 말이다.
반면 가해자들은 수감자들이 받는 마음의 위로를 이용했다. '음악이 연주되는 수용소'라는 타이틀은 그곳에 가서도 목숨을 잃지 않을 것만 같은 희망을 얻게 만들었다. 동시에 자신들이 느끼는 심적 부담도 같이 덜어놨다. 음악은 이들이 살인의 심각함을 잊게 하는 데에 기여한 셈이다. 음악은 시찰단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 분위기를 유쾌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렇게 작은 요소만 살펴봐도 음악은 피해자들보다 가해자들에게 더 이용 가치가 높았다. 가해자들에게 음악은 살인 공장이 돌아가는 중요한 요소였으며, 매끄러운 흐름을 도와주는 음악 노예는 운영 비용도 크게 들지 않았고, 명령만 내리면 언제라도 연주 가능한 편리한 '도구'였다.
거짓과 기만으로 사람들을 유인해서 살해하는 시스템과 학살.
거기에 항상 음악이 연루되어 있었다.
어쩌면 음악은 양면적인 것이 아니라 너무나도 포용적인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도구로 이용당한 자신의 모습도 그대로 수긍해 변화의 주체에게 자신을 맡겨버린다. 음악이 당시 강자의 의도대로 연주되고, 거의 사라져버린 피해자들의 음악을 볼 때 정치와 음악의 밀접한 연관성도 엿볼 수 있었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말한 '문명은 실패했다.'라는 문장이 떠오른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아프지만 살인자들의 잔인함과 음악의 부적절한 사용을 직시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경계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