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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도르노 Sep 27. 2022

자본주의라는 부정적 현실과 예술의 관계

서구 마르크스주의 미학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의해 확립된 마르크스주의는 전 세계에 널리 퍼져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그리고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죽고 난 후, 시대 흐름의 영향으로 과학성보다 계급성, 당파성, 정치성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이론적 측면에서도 다양하게 나뉘게 되며 19세기 말에는 논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레닌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확립하며, 레닌주의에 기초해 러시아 혁명을 실현했고 사회주의 건설을 추진했다. 1920년대 중반 이후 마르크스주의는 두 흐름으로 갈라지게 되었는데, 그중 하나의 갈래가 바로 서구 마르크스주의이다. '정통' 마르크스주의는 소련에서 스탈린주의 체제에 의해 학문의 자유가 제한되고 일종의 지침을 강요당했던 현실 사회주의권의 연구였다. 하지만 서구 마르크스주의는 독일, 프랑스, 이태리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지금까지와는 다른 별개의 해석을 추구한다.


서구 마르크스주의가 중심적으로 연구되었던 유럽의 세 나라는 현실 사회주의권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더 오랜 역사와 교양 시민층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 시민사회 내에서 예술이 강력한 영향을 주기도 했기 때문에 서구 마르크스주의 미학은 더 다양하고 세련된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서구 마르크스주의 미학의 주된 추동력은 예술과 현실의 관계였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본주의라는 부정적 현실 속에서 예술이 현실과 맺을 수 있는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관계에 대한 실천적 관심'이었다.


20세기 전반기 독일어권에서 활동하던 이들

Georg Lukacs(1885~1971), 헝가리

게오르그 루카치

루카치는 서구 마르크스주의와 서구 마르크스주의 미학의 문을 동시에 연 인물로 평가된다. 루카치에게 훌륭한 예술작품이란 현실감 있는 개별 인물들과 행위를 통해 사회의 내적 구조와 운동을 드러내고 인간 삶의 전체성에 대한 감각을 되살리는 것이다. 사회와 자연의 상호작용, 사회와 개인 사이를 매개하는 다양한 제도들, 사회역사적 변화의 전망들을 드러내는 것이다. 루카치는 이러한 과업을 19세기 전반의 프랑스 리얼리즘 소설과 19세기 말 ~ 20세기 초 사이의 독일과 러시아의 비판적 리얼리즘 소설이 성취했다고 보았다.


Theodor W. Adorno(1903~1969), 독일

테오도르 아도르노

아도르노의 미학은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총체적인 부정적 인식과 유일한 희망으로서의 자율적 예술이라는 대립구도 속에서 전개된다. 아도르노에게 지배자인 부르주아도, 피지배자인 노동자 계급도 도구적 이성의 희생자였다. 하지만 개념적 언어는 고통을 표현할 수 없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고통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비개념적 언어로서의 예술이다. 예술작품의 요소가 현실에서 가져온 것일지라도, 현실로부터 스스로를 떼어낼 수 있다. 자율적 예술에서 유토피아는 '부정적 현실에 대한 부정'으로 간접적으로만 나타날 수 있다. 자율적 예술은 의미의 강력한 부재를 형식화함을 통해서만 의미를 성취한다. 예술은 '수수께끼'가 되었고 그것인 채 남아있어야 한다. 아도르노가 모더니즘적 작품들을 옹호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Peter Bürger(1936~2017), 독일

사진출처 Texte zur Kunst

페터 뷔르거

[아방가르드의 이론] 저자인 뷔르거에게 예술은 사회에 외적인 것으로 실체화되지 않으며 여전히 사회적 총체성의 일부였다. 예술이 실제 생활과 떨어져 있더라도, 현실에 대한 해석을 제공해주거나 현실에 대한 욕구를 만족시켜주는 한 예술은 실제 생활과 여전히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게 '아방가르드'는 시민사회의 예술제도가 가지는 자율성을 거부하는 운동이었다. 때문에 [아방가르드의 이론] 등에서 자율적 예술이 제도적으로 형성된 논리에 대해 개념화하길 바랬다. 하지만 '예술제도의 거부'는 실패했고, (뷔르거에게) 아방가르드는 '역사적'이 되었다.


Walter Benjamin(1892~1940), 독일

발터 벤야민

히틀러가 집권했던 시기(1933년부터 1945년), 히틀러는 '모던한 테크놀로지'를 동원하여 '정치의 심미화'를 진행시켰다. 대중을 파시즘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기술(영화)을 통해 정치를 미화시킨 것이다. 벤야민은 이러한 위기상황에 '예술의 정치화'라는 답을 내놓았다. 벤야민이 말하는 예술의 정치화는 단순히 올바른 견해를 담은 예술작품이 아니었다. 그것은 현존하는 예술 생산력을 발전시켜 예술가와 감상자 사이의 분리를 제거하고, 예술작품을 대하는 새로운 감수성을 낳는 것이었다. 특히 기술적 복제는 감상자가 자신의 구체적인 생활공간 속에서 예술작품을 만날 수 있기 때문에 예술의 정치화에 새로운 차원을 열어준다.


마르크스주의 미학이 독일에서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을 때, 안정적인 자본주의 발전을 누렸던 영어권에서는 마르크스주의가 (특히 미학이) 큰 관심거리가 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점차 영어권에서도 마르크스주의 미학의 연구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들의 작업은 독일어권과는 달리 예술작품의 철학적 진리 내용이나 예술 전체의 역사적 운명에는 무관심하다.

마르크스주의는 모든 이데올로기적인 해석들을 부분적인 계기들로 삼아 문학 텍스트를 여는 마스터키이다.
[미학의 역사] - <마르크스주의 미학 - 서구 마르크스주의(정성철)>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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