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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도르노 Dec 13. 2022

도의 전달이 아닌, 자유로운 정서를 표현하는 예술로

조선 후기 예술론 (1) - 16 ~ 17세기

조선에는 예술 활동이 아예 없다고 할 수 없지만, '예술'이라고 총괄할만한 명칭이 존재하지 않았다. 아름다움을 공통적으로 추구한다는 사고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 시기 예술과 상당히 근접한 분야로는 시, 회화, 서예 정도였다.

도는 문장의 근본이며 문장은 도의 말단이다. - 율곡 이이(1536~1584)

개국이래 조선의 통치이념인 성리학에 충실했던 예술론은 '도道'를 중시했고, 이를 '재도론載道論'이라고 부른다.(재도 : 도덕적 가치를 실음) 이 시기의 문장이란 도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문장은 도에 속해있으므로 도를 벗어난 문장 고유의 영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도의 전달에 방해가 될 수 있는 문장의 꾸밈이나 개인의식은 규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임진왜란(1592~1598) 이후 예술에서 점차 개인의식과 정신적 유희가 중요해지기 시작했다. 임진왜란 전후의 문인들 사이에서는 회화를 모으고 감상하는 풍조가 급격히 고조되어 갔기 때문이다. 이들은 서화 감상을 적극 애호하긴 했지만, 서화와 도의 관계를 진지하게 고려하지는 않았다. 이를 진지하게 논하는 것과 더불어 문학의 자율성에 관한 학문적 토대를 마련한 것은 17세기 후반 이후이다.


김창협(金昌協)

농암 김창협(1651년 ~ 1708년)

 이 시기 학자들은 정의 종류가 일곱 종류로 분류된다고 생각했다. (희喜·노怒·애哀·구懼·애愛·오惡·욕欲) 그러나 김창협은 현실적으로 인간의 정이 단지 일곱 종류로 분류될 수 없을 만큼 다양하다고 주장했다. 그의 새로운 정에 대한 태도는 사상계와 예술계에서의 큰 영향력을 통해 예술창작에 훨씬 큰 자유의 여지를 제공하게 되었다.


문예론

김창협을 중심으로 모인 문하들은 시, 서, 화를 통해 개인적 자아 표출의 경향을 확대시키고 사상적으로 정당화시켰고, 이 학파를 '농연일문農淵一門'이라고 칭한다. 농연일문은 학문의 대상을 '이', 시의 대상을 '천기'라고 구분하며 이는 학문, 천기는 예술의 대상으로 명시했다.

이(理, 다스릴 이) - 현실의 존재들에 내재한 보편적 존재 원리
천기(天機, 하늘 천/틀 기) - 있는 그대로의 자연 전체, 특히 현실 존재들의 차별성

김창협은 천기를 드러내는 데 학문이 적절한 방식이 아니라고 말한다. 천기는 '우연적인 무심한 마음'으로서만 드러날 뿐이다. 그리고 이 마음은 성리학에서 경계하는 '흥'과 같은 즉흥적인 감성을 지시한다. 김창협에 의하면 천기는 만물을 왜곡시키는 의식을 중단하고 세계의 본체를 획득한 마음만이 대상 전체를 있는 그대로 수용할 수 있다. 논리와 개념 바깥에서 전면적으로 진眞을 획득하는 인식의 체험을 지시하는 것이다.


예술비평

김창협은 명대 의고파(擬古, 옛것을 본뜸)를 따라 개성이 소멸된 작품을 강력히 비판했다. 또한 그는 문장론에서도 단순한 사건의 나열이나 논리적 전개를 넘길 바라며 풍채의 수려함, 미적으로 단련된 음조를 높이 평가했다. 주관적 정취와 언어의 형식미, 그리고 개인의 진실한 정서 추구를 옹호한 것이다. 김창협에게 시는 더 이상 도를 전달하는 수단이 아닌, 하나의 독립된 고유의 영역이었다.


화론

개성과 천기, 정의 표현을 중시하는 관점은 화론에서도 지속된다. 농연일문의 회화관은 이들과 함께 어울렸던 정선의 회화에 대한 평가에 속에서 살펴볼 수 있다.

정선의 인왕제색도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인왕제색도는 정선이 조선 후기에 그린 대표적인 회화 중 하나이다. 농연일문은 정선의 회화가 "필력이 가장 웅건하고 화면 위에서 어지럽게 물을 뿌리며 분노하며 다가오는 회오리가 물을 뿌리는 듯 사람을 두렵게 한다."라고 한다. 또한 이들은 정선이 빈 화면을 응시하고 상상하여 대상을 얻고, 그 대상의 형태와 기세를 임의대로 표현하여 천취를 얻었다고 이해했다. 작가가 주관적으로 대상의 감각적 형태 너머를 포착하고 이를 즉흥적인 필묵을 통해 표현하는 것을 사대부적 예술로 이해한 것이다.


농연일문은 문예론에서와 달리 화론에서는 단편적인 감상론 외 체계적 이론을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간단한 감상에서도 이전보다 훨씬 자유롭고 격렬한 정서로서의 천취를 긍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도덕과 부딪히지 않는 한에서 자유롭고 풍부한 정서를 추구하고 스스로 즐겼으며, 이는 조선 후기에 확장된 사대부 정신세계의 징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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