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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도르노 Dec 20. 2022

예술은 공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것이다.

조선 후기 예술론 (2) - 18세기

18세기 초반 논쟁의 중심은 '성품'이었다. 인간과 물질의 성품은 동등할까? 하늘이 인간과 만물에게 같은 성품을 부여했다고 주장(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하는 이들도 있었고, 인간은 인의예지 성품을 온전히 받았지만 만물은 온전히 받지 못했다고 주장(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러한 인물성동이논쟁(호락논쟁)은 인간의 주체성과 도덕의식을 함양하는 데에 기여하게 되었고 동시에 예술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조선 최후의 부흥기를 이끌었다고 평가되는 영정조대 시기(1724~1800)의 예술론을 통해서 어떤 변화가 있는지 알아보자.


문예론


조귀명 趙龜命

조귀명(1692~1737)은 이제까지의 도와 문장 간의 긴장된 타협을 깨트린 인물이다. 조귀명은 글을 공적인 글과 유희를 위한 글로 나누었으며, 유희를 위한 글은 일시적 즐거움을 위한 것이지 사회와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도는 영원하고 바꿀 수 없는 것이지만 글은 시대와 개인에 따라 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에 의하면 인간은 각자의 개성을 지녔기 때문에 항상 동일한 도의 보편성을 획득할 수 없다. 때문에 글은 애초에 도를 담을 수 없으며 단지 개인이 얻은 부분을 표현할 뿐이다. 조귀명의 이러한 문장론은 극단적인 성격에 비해 상당히 높이 평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용휴 李用休 , 이가환 李家煥

이용휴(1708~1782)와 이가환(1742~1801) 부자는 여주 이 씨 일문의 대표인물들이다. 안산을 중심으로 활동한 여주 이 씨 일문과 그 주변 문인은 산문과 시 두 분야에서 영정조대 문단의 특수성을 집약적으로 드러냈다. 이들은 사회로부터 소외된 자아의 '개인'적 차원을 추구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들은 예술의 진리가 극에 이르면 사회와 전통을 거부하는 광기로 드러날 수 있고, 예술이 공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패관문학 稗官文學

조선 후기 예술에서 개인을 강조하는 경향이 강화되다 보니 정조대에서 나라에 도움 되는 공적인 문학이 위축되는 문제가 생겼다. 이에 정조는 친위 학자군을 육성하고 북학(청나라 문물을 배우는 학문)을 장려하면서 성리학에 새로운 국면을 조성했는데, 몇 학자들이 정조의 의도를 넘어 '패관문학'을 탐닉했다. 패관문학이란 임금의 정사를 돕기 위하여 가설항담을 모아 엮은 문학을 뜻하는데, 형식적인 면에서 문장의 길이가 짧고 구어와 비속어를 많이 사용하며 전통의 격식을 벗어난다는 특징을 가진다. 뿐만 아니라 내용상으로도 국가보다는 개인의 내면을 중시하며, 따라서 논리적인 기술보다는 감상적인 표현이 주를 이룬다.


산문체뿐만 아니라 시에서도 개성을 추구하는 경향이 지속된다. 이 시기 북학 사대가들은 신운설과 성령설을 적극 수용하였다. 신운은 맑음 혹은 아득함과 같이 시 안에 존재하지 않지만 시를 통해 감상자가 경험할 수 있는 여운의 미를 의미한다. 성령은 개인의 능력이자 예술의 고유한 능력이라는 의미이다. 신운선과 성령설은 당시 시단에서 사회적 자아를 뒤로하고 개인적 자아를 추구하는 특징을 보였다.


화론

18세기 화론은 문예이론과는 달리 개인 서정의 표현 쪽으로 크게 접근하지 못했다.


조영석 趙榮祏

조영석이 그린 화첩 중 바느질 장면.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조영석(趙榮祏))]

조영석(1686~1761)은 18세기 초중반에 뚜렷한 회화관을 남긴 대표적인 문인이다. 그는 본래 회화를 세상을 잘 다스리기 위한 유용한 기술로 간주했다. 그랬던 조영석이 특히 업적을 남긴 분야는 유가의 감계적(본보기가 되는) 회화론이 주 대상으로 삼는 인물화였다. 문인화의 대표 장르였던 산수화에서도 '산수화 감상의 목적은 외물을 보고 느끼려는 것이지 자연의 아름다움을 찬탄하는 데 있지 않다'라고 말하며 같은 논지를 관철했다.


강세황 姜世晃

표암 강세황의 71세 때의 자화상, 보물 제590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강세황(1713~1791)은 화단에 공식적인 영향력이 컸던 인물이다. 그는 회화 고유의 창작원리인 형사形似(모양 형/닮을 사)를 중시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대상을 감각적으로 직접 경험해야 하고 이는 사생(실물이나 경치를 있는 그대로 그리는 일)의 필수 불가결한 조건이다. 이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인물의 내면세계까지 그려낼 수 없다. 동일한 시기에 서(서예)와 화(그림)의 결합인 서화동필론이 강조되기도 했는데, 형사를 매우 중시한 강세황은 이에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강세황은 중국 문인화론이 제시한 화화 창작의 요소를 숙지한 흔적을 남겼지만 시, 서, 화에 동일한 예술 이념을 제시하고 이를 이론적으로 체계화시키는 작업은 다음 세기의 과제로 넘겨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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