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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도르노 Dec 27. 2022

추사 김정희가 모색한 도道와 개성의 공존

조선 후기 예술론 (3) - 19세기

문장에는 도道가 담겨있어야 할까 각자의 개성과 감정이 담겨있어야 할까?

이 질문은 19세기 조선에서 매우 중요한 논쟁거리였다. 문장이 도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개인의 감정이 도를 전달하는 데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고, 반대로 개성과 감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예술을 규정하는 가장 근본적인 토대가 개인이라고 생각했다. 극과 극의 의견이 공존하던 시기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양극 사이에서 학문과 예술, 전통과 개인이 공존할 수 있는 길을 모색했던 인물이 있었다.



김정희

김정희 초상/이한철 1857년, 비단에 채색, 131.5×57.7㎝, 보물 제547호, 개인소장. (ⓒ국립중앙박물관)

김정희金正喜(1786~1856)는 시, 서, 화에서 모두 예술 고유의 영역을 확신하고 그 이념을 체계화하는 보기 드문 시도를 했다. 그는 시서화가 사대부들이 공부했던 근본적인 학문(수양, 학문, 치국)에 비해서는 하찮지만 학문적 체계와 그에 따른 학습을 갖춘다면 예술이 될 수 있다고 말하며 각 이론에 동일한 창작론을 부여했다. 또한 명, 청나라 시대의 예술론을 절충하여 정교한 이론을 만들어내려고 의도했다는 점 역시 주목할만한 부분이다.


문예론

문장론

문도상수론 : 문장과 도는 서로 독립적인 영역을 가지되 상호의존하는 관계에 있다.

김정희는 문장론에서 문도상수론을 표방한다. 그에 의하면 문장을 창작하는 작가는 인격을 수양해야 하고 학문도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또한 그는 언어의 미적인 영역까지도 인정하였다. 미적인 영역이 도를 효율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시론

- 신운설 神韻說 : 묘한 언어와 재미가 있어야 한다. 특정한 미.
- 성령설 性靈說 : 성정 性情(인간의 성품과 감정), 영감을 강조한다. 예술 창조의 능력.
- 격조설 格調說 : 시의 격조(시가의 형식과 가락)를 주장한다.

김정희의 시론에는 위와 같은 세 가지 축이 있다. 작시의 근본이 언어로 규정된 특질(실경)과 언어 너머의 특질(신운)을 겸비하는 데 있다고 보았던 그는, 신운설이 보완될 필요성에 대해서 언급한다. 그에 따르면 신운설의 제창자인 왕사정(청나라 시인)은 격식을 넘은 자연의 높은 경지를 이루었다. 하지만 왕사정의 시는 매개체가 뚜렷하지 않아 '학습'되기 어렵기 때문에 배우기 쉬운 시로 보완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김정희는 이렇게 보완했던 신운설과는  반대로 성령설에서는 규제하는 태도를 취했다. 그는 성령을 선전적 재능과 후천적 단련을 갖춘 창작 재능이라고 보았는데, 이 재능이 반예교적 속성을 가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김정희는 시론에서 유가사상에 기반을 둔 예술 고유의 영역을 확보하면서도 신운설과 성령설을 보완, 규제하며 절충했다.


화론

김정희필 세한도/인위적인 기술과 허식적인 기교주의에 반발하여 극도의 절제와 생략을 통해 문인화의 특징을 엿볼 수 있는 조선 후기 대표적인 문인화로 평가되고 있다.

김정희는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화단을 비판했다. 왜냐하면 그가 보기에 지금까지 조선에 흘러들어온 이념과 기법들은 조선에 비체계적으로 들어와 불완전하게 실천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그가 강조한 두 가지 의견이 있다. 첫째, 그림의 품격은 그림 그리는 방법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닌 저너머 의에 의해 결정된다. 둘째, 그는 문인예술의 자격으로서 학문을 바탕으로 도를 준수하는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훈련이 요구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중국의 체계화된 이론을 조선의 현실에 맞게 변형하여 정착시키고자 했던 듯하다.


서예론

고금역대법첩/중국과 한국의 역대 서예가들의 필적을 모아 엮은 명필의 서첩. 1책. 목각탑본. 1859년 박문회가 펴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유남해)           

김정희의 서예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비학'과 '첩학'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비학은 '비석'을 숭상하는 학파이고 첩학은 '법첩'을 숭상한다. 여기서 비석은 옛사람의 행적을 돌에 새긴 것이고, 법첩은 명필을 모아 글씨연습을 하거나 감상하기 위해 돌이나 나무로 만든 책을 말한다. 비학은 골격이 강한 서체를 가졌고 첩학은 부드럽고 유려한 서체를 가졌다. 비학과 첩학은 서로 상대적인 개념인 것이다. 김정희는 이렇게 상대적인 비학과 첩학을 서로 절충한 정통 서예사 학습을 강조했다. 그리고 김정희가 금서체(비학)와 첩서체(첩학)에 절충적인 경향을 띄었다고 말한 서체가 바로 왕희지체이다.

왕희지의 글씨, <난정서> 부분

김정희는 두 서체의 미적 특징의 절충이 왕희지(중국 동진의 정치가, 시인, 서예가)로부터 청대까지 계승되었다고 본다. 김정희는 최신의 서예관계 연구업적들을 확보하고 전통적인 서예론을 보다 실증적이고 체계적으로 이끌어 올리려고 했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김정희는 시, 서, 화에 대해 체계적이고 단계적인 창작학습의 원리를 요구했다. 그리고 그는 세 영역이 각자 고유성의 한계를 넘어 궁극적 차원을 공유할 때 완성된다고 보았다. 이것이 바로 깨달음의 영역으로서 시서화가 기술이 아닌 문인의 예술이 되는 자격조건이다.

조선 후기인들이 진지하게 추적해 갔던 예술과 사상 및 윤리의 관계는 현재에도 끊임없이 질문되고 있으며 예술의 자격조건 역시 지속적으로 논의된다. ... 세계관에 무관심한 현대에서 예술은 무엇을 표현하고 전달하고 있을까. 그 가능한 가짓수를 셈하는 데 조선 후기 예술론은 우리에게 끊임없는 대화를 요구하는 것으로 보인다. - [미학의 역사] <조선 후기 예술론의 전개 - 정혜린>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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