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예도르노 Jan 24. 2023

간단히 알아보는 한대 미학사상

한(漢) (기원전 3세기 ~ 기원후 3세기)

통일 후 진나라(왼), 2세기경 한나라 영토(오) 출처 : 위키백과

기원전 221년, 진나라는 혼란스러웠던 춘추전국시대를 강력한 군사력으로 통일했다. 이들은 엄격하고 강압적으로 나라를 다스렸는데, 이는 오히려 백성들을 탄압하고 박해하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진나라는 기원전 206년 반란으로 멸망했고 이어서 한나라가 기원전 202년부터 기원후 220까지 약 400년 동안 통일왕조를 지속하게 되었다. 진정한 의미의 통일제국이 탄생된 것이다. 중국의 역사상 가장 강대했던 시기 중의 하나이며 중국 문화뿐만 아니라 한국과 베트남 등 동아시아 문화권 전반의 기틀을 이룩한 왕조로 평가된다. 이러한 한대의 문화와 사상은 유가(공자의 학파)를 나라를 다스리는 중요한 생각으로 내세우면서도 다양한 사상을 포섭했다. 유가와 그 외 사상 사이의 관계는 크게 세 단계의 변화를 겪었다.


1. 무위(無爲) 사상

자연에 따라 행하고 인위를 가하지 않는 것. 인간의 지식이나 욕심이 오히려 세상을 혼란시킨다고 여기고 자연 그대로를 최고의 경지로 본다.

한대 사상의 첫 번째 단계이다. '초한대전'으로 중국을 재통일한 한나라는 진나라처럼 금방 멸망하고 싶지 않았다. 때문에 많은 고민을 거쳤고 그 결과 '오랜 전란에 지친 백성을 쉬게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무위를 정치의 기본 원칙으로 삼았다. 또한 진나라 때의 사상을 탄압하는 대신 여러 사상과 학파를 육성했고 각자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는 정책을 시작했다. 이렇게 다양한 사상이 혼재하는 상황 속에서 가장 유행했던 것은 '황노(黃老) 사상'이었다. '황로학(黃老學)'에 의하면 외면적인 법과 내면적인 마음은 서로 대립한다. 하지만 이를 조화시킴으로써 내면의 도덕인 도에서 법이 생겨나고, 이러한 도는 법을 초월한 것이다. 노자에 바탕을 둔 자유방임적 정책으로 볼 수 있는 황노사상에 입각하여 강압 없는 정치(무위정치)를 시행한 결과 한대 건국 초기 황실의 권력은 공신, 지방의 호족, 상인들의 세력에 눌려 매우 위축되어 있었다.


2. 천인감응론(天人感應論)

"하늘과 사람은 하나로 통한다".

전한의 제7대 황제였던 무제(武帝)는 황제의 권력을 확대하고자 황실을 위협하는 세력 바깥에서 관료들을 대거 등용했다. 이렇게 새로 등용된 문인들은 유가를 근간으로 삼았고, 한대 금문학파와 천인감응론을 만든 '동중서(董仲舒 B.C. 176(?)~B.C.104)'도 이들로부터 배출되었다. 동중서의 사상은 음양오행에 강력한 영향을 받았다. 그에게 모든 존재의 궁극적인 근원은 기(氣)이다. 이 기는 음(陰)과 양(陽)으로 나뉠 수 있는데 음양으로 나누어지지 않을 때는 하나가 되어 그것을 '원기(元氣)'라고 부른다. 이러한 배경에서 동중서는  천인동구론과 천인감응론을 제시했다.

천인동구론 : 인간과 자연이 동일한 구조와 성질을 가짐. 따라서 양자는 같은 종류의 기를 통해 호응한다. 인간이 자연의 의지를 따라야 한다.
천인감응론 : 자연과 인간이 상호 호응함. 자연과 인간은 선이나 악 같은 종류의 기와 호응한다. 현실에서 군주는 충실히 천의 의지를 따라야 할 의무를 가진다. 그렇지 않을 경우 자연은 국가의 잘못을 견책하거나 위력을 행사한다.

천인감응론에 따르면 우주 만물이 모두 '기'로부터 파생되었기 때문에 만물은 모두 기로 환원될 수 있다. 따라서 '기'라는 기초 위에서 보면 만물은 모두 같다. 또한 동중서는 사람의 신분이 원기의 많고 적음에 따라 달라진다고 말한다. 따라서 그에게는 군주가 하늘과 땅 사이에서 존재하는 만물 중 으뜸이며 원기가 가장 많은 사람이 바로 군주이다. 동중서는 이러한 천인상응의 이론으로 우주론을 체계화하여 왕권을 정당화시켰다.

<금문학파에 대하여>
[서경(書經)]은 중국 유교의 5경 가운데 하나로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서이다. 공자가 편찬하였다고 전해진다. [서경]은 3000편이 있었다고 하지만 전해지는 것은 고문(古文) 25편, 금문(今文) 33편 등 58편에 불과하다. 기존의 판본인 《금문상서》를 지지하는 금문가(今文家)와 새로운 판본인 《고문상서》를 지지하는 고문가(古文家) 사이에 금고문 논쟁(今古文論爭)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고문상서(古文尙書)는 공자의 옛 집을 허물다 벽에서 발견했다는, 춘추시대의 문자체(진(晉) 나라의 문자)로 쓰인 고본을 말하고, 금문상서(今文尙書)는 과거 진(秦) 나라의 박사였고 상서에 정통했던 복생(伏生)의 말을 조조(晁錯)가 당시 통용되던 예서(한자 서체의 종류 중 하나)로 정리한 것이다. 사정이 이런 만큼 고문상서와 금문상서는 별차이가 없었다고 하나 이후 금문학파와 고문학파로 나뉘어 전수되었다.
(출처 위키백과)


3. 후한대

동중서의 사후, 천인상응론은 인간보다 하늘을 더 중시하는 참위설로 변질되었다. 후한대 사상계는 이에 대해 지속적으로 비판을 가했고 금문학파의 도참과 참위적 경향을 제거하는 것을 우선적 과제로 생각했다.

<도참圖讖과 참위讖緯적 경향>
참위와 도참은 유사한 의미를 가지는데, 예언을 믿는 사상을 말한다. 풍수지리를 통해 인간의 현재와 미래의 길흉화복을 예언한다. 참위설은 공자에 신비와 초인성을 부여해서 신의 경지에 올렸다. 종교적 신앙의 대상이 바뀐 것이다. 유교의 종교적 변질이 여기서 시작되었다.

이 시기 대표적인 학자들은 고문학파였다. 이들은 금문학파의 목적론적 우주관을 비판하면서 다시 인간의 자율의지를 회복하고자 하였다.

목적론 : 인간의 행위뿐만 아니라, 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과 사건의 현상이 목적에 규정되어 있다는 철학적 입장

우주관 : 우주의 기원, 본질, 발전 따위에 관한 학설. 세계에 있어서 인간 문제에 관한 관찰이나 견해


이렇게 살펴보았을 때 한대에는 이미 미의식이 본격화되었고 문화가 다양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한대인들은 아직 사상이나 윤리로부터 독립된 예술에 대해 자각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예술과 미에 관한 독립적인 저술이나 논문도 남기지 못했다. 이러한 이유에서 중국 예술론의 시작을 한대가 아닌 위진남북조 시대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이들이 선진 시기의 사상을 절충하고 체계화하였고, 미에 대한 유가와 도가의 논의를 결합시켜 후대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쳤다는 업적은 부정할 수 없다.

매거진의 이전글 성어(成語)로 알아보는 고대 중국미학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