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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도르노 May 10. 2022

그들의 쾌는 감각의 쾌락이 아니다.

데모크리토스와 소피스트의 영향을 받은 학파들

 피타고라스주의에 정면으로 도전했던 소피스트들에게 미는 시각과 청각을 통해 즐거움을 주는 것이었다. 단, 이때 언급되는 즐거움은 현대 사회에서 자주 쓰이는 '도파민 중독'과 같은 의미가 아닐 것이다. 이들, 특히 '고르기아스'는 언어를 중요하게 여기며 언어가 기만을 제작하여 영혼에 정서적인 반응과 쾌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말했다. 언어가 이러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으려면 엄밀하고 명료한 조직과 구조가 필요했다. 아무렇게나 내뱉는 시나 웅변은 영혼에 영향을 줄 수 없다는 것이다. 혹여나 쾌락주의라는 단어를 보고 '비생산적인' 쾌락을 생각했다면 그것은 잘못된 인식이라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를 경계로 서양 고대 미학은 헬레니즘 시기로 넘어가게 된다. 헬레니즘 시기는 일반적으로 후기 고대로 분류된다. 이 시기의 미학은 여러 학파들의 사상 속에서 발견된다. 이 시기에 등장한 에피쿠로스 학파와 회의주의 학파는 과거 그리스 예술이 신화적이고 이상주의적이라는 전통에 대해 비판적이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이번 글에서는 데모크리토스 이론을 기반으로 한 쾌락주의 가치론을 이어받은 이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에피쿠로스 학파
에피쿠로스 (B.C 347 ~ B.C 270)

에피쿠로스 학파의 창시자인 '에피쿠로스'는 데모크리토스의 이론을 기반으로 쾌락주의 가치론을 정립했다. 그에게 있어 모든 가치는 곧 쾌이다. 하지만 그 쾌는 순간의 쾌락이나 감각의 쾌락이 아니었다. 그는 쾌라는 개념 아래에서 일생을 통해 지속되는 내적 행복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를 "영혼의 평정"이라는 말로 표현했고, 삶에 있어서 영혼을 동요시키고 괴롭히는 수많은 공허한 의견들로부터 영혼의 해방을 의미했다. 이와 같은 종류의 쾌락은 소극적 자세에서 성립한다. 감각적인 것을 추구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그는 예술이 참된 종류의 쾌를 가져다주는 활동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특히 시에 대해 비판적이었는데, 그에게 시는 소음이자 어리석은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에피쿠로스에게 있어서 시는 신화를 통해 해로운 유혹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에피쿠로스 주의자 '필로데모스'도 음악에 대한 전통적인 신화적 이해 방식을 비판했다. 과거 데모크리토스와 맥을 같이하여 피타고라스 학파의 음악론에 대한 비판이다. 그에 따르면 음악은 신의 선물이 아니라 인간의 고안물이며, 음악은 인간의 감정과 성격을 모방함으로써 인간의 성격에 도덕적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그는 과거에 음악이 모방한다고 생각했던 인간의 영혼은 사실 음악의 특성이 아닌 외부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다. 이는 사람들이 같은 음악을 듣고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다는 사실을 통해 설명된다. 따라서 음악은 그 자체로 인간 영혼의 특성을 모방할 수 없고, 인간의 정서에 교육적 영향력도 미칠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상 음악이 인간의 영혼에 미치는 영향력은 요리술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했다.  

 같은 에피쿠로스 주의자이지만 시가 갖는 쾌의 가치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취한 철학가도 있었다. 바로 '호라티우스'이다. 그는 시의 도덕적 가치 또한 인정했다. 시는 읽는 이에게 즐거움을 주는 동시에 가르침 또한 준다는 것이다. 유익함과 즐거움을 혼합시켜놓은 시인이 모든 이의 칭찬을 얻었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호라티우스의 입장은 에피쿠로스 학파 내에서 매우 독특한 입장이었다. 하지만 이를 통해 후대 사람들은 시를 이해할 때 쾌의 가치와 도덕적 가치 두 가지 모두를 통해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었다.

회의주의 학파

피론 (B.C  360 ~ B.C  270)

 '피론'에 의해 창시된 회의주의 학파는 에피쿠로스 학파와 공통점이 많다. 시와 음악에 대한 비판적 평가의 입장을 취했고, 영혼의 평정을 삶의 최고의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이에 도달하기 위한 길에 대한 생각에서 에피쿠로스 학파와 구별된다. 회의주의 학파는 소피스트의 인식론적 주관주의에 영향을 받았다. 감각의 쾌는 보고 듣는 이들에 따라 상이하게 경험된다는 것이다.

 회의주의 학파에 의하면 인간은 감각을 통해서도 이성을 통해서도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 단지 사물들이 어떻게 보이는지 서로 다른 다양한 주장들만을 가질 뿐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인간은 인식의 한계로 인해 지혜로운 사람은 모든 것에 대해 판단을 유보하고, 지식 자체를 거부함으로써 이론적 주장에 빠지는 일을 삼가야 한다. 오직 이런 길을 통해서만 인간은 영혼의 평정에 이를 수 있다고 했다. 단어 그대로 지식 자체에 회의적이다. 이와 같은 생각은 예술에 대한 논의에도 반영되었다. 과거의 신화적이고 이상주의적인 이해를 가진 예술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동시에 예술에 대한 이론적 주장 자체에 대해 거부하는 입장을 보여 주었다.

 회의주의자 '섹스투스 엠피리쿠스' 또한 시에 부여되던 진리성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시는 그것에 담겨 있는 허구가 인간의 마음을 혼란시키기 때문에 쓸모도 없고 해롭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시는 기껏해야 즐거움을 줄 수 있을 뿐이며 참다운 행복이나 미덕을 가르치지 못한다. 시에 대한 모든 이론적 주장 자체가 불가능할뿐더러 필요하지도 않다고 말했다. 그는 음악에 대해서도 회의적이었다. 음악이 인간 영혼에 영향을 미쳤던 마술적 영향력은 사실상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에게서 음악이 인간 영혼에 미치는 영향은 단지 그가 빠져든 일정한 감정에서 일시적으로 벗어나게 하는 효과였다. 이것은 술이나 잠이 가져다주는 일시적인 마취와 망각의 효과와 유사하기도 한다. 이로써 그는 피타고라스학파의 생각과는 달리 음악은 철학과 같은 드높은 지위를 가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기원전 580년경에 태어났던 피타고라스와 기원전 490년경에 태어났던 최초의 소피스트 '프로타고라스'. 그로부터 약 250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났다. 지나간 시간이  느껴질 정도로 많은 생각의 변화가 느껴진다. 필자는 이후의 미학들도 결국 피타고라스와 소피스트 두 갈래에서 끊임없이 파생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피타고라스라는 이름이 지금에서도 자주 언급되는 이유일 것이다. 어마어마한 시간이 지난 지금에 닿기까지 아직 많은 여정이 남았지만 큰 뿌리를 잡았으니 즐겁게 나아갈 일만 남았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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