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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도르노 May 31. 2022

중세의 미학은 없다.

중세 미학사상의 흐름

 '중세'는 일반적으로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450년경부터 동로마가 멸망한 1400년대까지를 이른다. 중세라는 단어는 르네상스 시대 학자들에 의해 생겨났다. 그들은 고대문화를 칭송했는데, 그들에게 이런 고대문화가 단절되었던 중간 시대는 아무런 진보가 없었던 시기였다. 이 때문에 자신들의 시기와 고대 시기의 중간에 있는 중세(Middle Ages)라는 단어를 만들었고 '암흑시대'(Dark Ages)라고 부르기도 했다.

 르네상스 학자들은 중세를 암흑시대라고 불렀지만, 음악사적인 시선에서 중세는 고대의 전통을 계승하고 서양음악의 기초를 확립하는 중요한 시기였다. 하지만 철학적인 측면에서는 그렇게 의미 있지 못했다. 중세철학은 자신들의 신앙을 반대자의 공격이나 비웃음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출발했던 것이다. 철학이 '신학의 시녀' 로서 역할했다고 할 수 있겠다.


사람들은 신학의 시녀로서의 철학에 대해서 묻는다.

엄밀한 의미에서 중세에 '철학'이라는 것이 존재했다고 할 수 있는가?
철학이라는 것은 어떠한 교의적 권위에도 묶이지 않는 인간의 자주적이고 비판적인 사유여야 하지 않은가?

더 나아가 '중세의 미학'이라는 말이 성립 가능한 말인지에 대해 고민했다.

미학이라는 것은 개인적인 미적 가치의 향유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감성의 독자성을 전제하는 어떤 것이 아닌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술이라는 독특한 현상에 입각한 어떤 인식의 체계가 아닌가?

중세의 미학사상에 대해 명심해야 할 것은 이 시기의 미학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미학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바움가르텐에서 시작된 감성 미학 혹은 르네상스 이래의 예술미학 관점에서의 중세 미학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게다가 중세 미학은 자료가 너무 부족하다. '미학'이라고 구분이 명확하지 않았던 시대이니 만큼 미에 대한 언급이 매우 산발적이고 부수적이기 때문이다. 미를 독자적인 주제로 다루고 있는 저작들은 거의 없다. 이런 이유로 근대 이후의 미학적 관점에서 중세의 미학을 연구한다는 것은 큰 오류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중요하게 알고 가야 하는 이유는 이 사실을 알고 중세 미학을 바라보는 것과 모르고 바라보는 것은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중세미학의 두 전통

 중세철학은 당시까지의 인류의 위대한 정신적 전통들을 융합, 발전시켜 하나의 보편적(Catholic) 문화를 이루고자 하는 시도의 일환이었다. 마찬가지로 중세의 미학도 종합의 성격이 강하다. 중세 미학은 그리스도교의 성서, 고대 그리스 철학, 신플라톤주의와 같은 다양한 것에서 영향을 받았는데 그중에서도 신플라톤주의가 중세 미학의 가장 중요한 사상적 원천이었다.

 중세 미학은 크게 두 전통이 있다. 미의 본질비례에 있다는 입장과 빛(색)에 있다는 입장 두 가지인데, 이 두 형태의 사상이 경쟁구도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한 사상가의 저작에 이 두 가지 요소가 동시에 혼합되어 나타나곤 한다.

아우구스티누스 (354년~430년)

 비례의 미학을 대변하는 사상가는 '아우구스티누스'이다. 그는 미의 본질이 다양성 안의 통일성과 사물들의 수적인 비례와 조화에 있다고 보았다.

아름다운 것은 그 자체로 적당한 것, 조화로써 다른 사물들과 어울리는 것이다.
모든 미는 부분들의 비례에 근거하며 적당한 색채와 관련이 있다.
위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기타(5세기말~6세기초)

 빛의 미학을 대변하는 사상가는 '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기타'이다.  이름에 당황했다면 기억할 필요는 없으니 안심하고 빛의 미학의 내용에 집중해보도록 하자. 빛의 미학은 미의 본질이 광휘 혹은 명료성이라고 보는 입장이다. 그리고 미와 선이 동일시될  있다고 보았다. 아레오파기타의 사상 전승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인물인 '요한네스 스코투스 에리우게나' 모든 피조물을 하느님의 신성 현현으로 보았다. 그리고 신성 현현의 가장 중요한 방식이 빛이라고 말했다.

이 세계의 전체 구조뿐 아니라 모든 개개의 존재자가 빛이다.
그들 각각이 지니고 있는 빛의 성질, 즉 밝음으로 인해 그들은 자신의 근원을 각자의 방식으로 가리키고 있다.


스콜라철학

 이렇게 미에 대한 두 갈래를 바탕으로 12세기에는 미를 바라보는 관점이 다른 세 학파가 등장했다.  시토 학파는 세상의 미 안에서 정신적인 의미를 찾았고, 성 빅토르 학파는 눈에 보이는 미(가시적)가 눈에 보이지 않는 즐거움(비가시적)의  표기라고 주장했다. (“예술은 가시적인 것을 재현하는 게 아니라,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한다.”) 그리고 사르트르 학파는 우주가 수학적 원리에 따라 구성되어있다고 믿으며 미를 학문적으로 바라보았다.

 세 학파의 사상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스콜라철학'이라는 중세의 큰 흐름이 등장한다. 스콜라철학의 시기가 열리며 미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스콜라 초기 시기에 미는 '그 자체로 즐거움을 주는 것, 영혼을 기쁘게 하는 것,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정의되었고 이후에 여러 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진정한 미는 하느님 안에서 발견될 수 있다고 말한 '보나벤투라'의 사상은 스콜라적 미학의 전형적인 요소들을 잘 보여준다. 또한 역사적으로 위대한 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는 미를 "보여짐으로써 즐거움을 주는 것"이라고 압축적으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스콜라 미학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스콜라 철학은 당시에 너무도 큰 흐름이었지만 중세 미학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중세 미학은 고대나 근대 미학보다 훨씬 더 긴 역사를 지니고 있고 스콜라 미학 역시 12세기경에야 시작된 중세 미학의 한 흐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중세의 미는 빈틈없이 짜여진 신학적, 우주론적, 창조론적 체계 속에서 언제나 어떤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속성으로 규정되었다. 주관성이나 예술적 감수성과 같은 '개인'이라는 것이 미 개념에 들어설 자리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중세 미학과 근대 미학의 넘을 수 없는 차별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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