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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ella Dec 19. 2022

서점 주인과 나의 공통점_북 큐레이터

'우리는 책의 파도에 몸을 맡긴 채'를 읽고



1. 북 큐레이터로서의 책방지기

여행지에 가면 늘 의식처럼 지역 서점에 들르곤 한다. 책방지기 특유의 '북 큐레이션'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어느 동네 서점에서 사두었으나 한참을 묵혀두고 있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꺼내 들었다. 일상을 담은 이야기이겠거니 했는데 일상과 책을 녹여낸 플롯이 아름다워서 천천히 음미하듯 작가의 견해를 읽어 내렸다.



합정 땡스북스. 2021년.


마이클 바스카의 《큐레이션》은 ‘큐레이션’이라는 개념의 통용이 과잉의 시대에 필연적으로 맞닥뜨리게 되는 ‘선택’의 문제에서 비롯한다고 말한다. 1793년에 개관한 루브르 박물관은 나폴레옹 시대를 거치며 유럽 주요 도시에서 입수한 전리품으로 말미암아 그 소장 규모가 기하급수적으로 비대해졌다. 이에 당시 박물관 책임자였던 도미니크 비방 드농은 획기적인 전시 방식을 도입했다. 바로 소장품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던 것. 이전까지의 박물관이 수집품의 볼륨을 최대한 늘리는 데 급급했던 것에 반해, 루브르 박물관은 소장품을 연대기별로, 작가가 속한 학파별로 분류하기 시작했다. 이 같은 ‘수집’에서 ‘분류’로의 관점의 이행은 19세기 전반 모든 박물관에서 큐레이션이라는 어젠다를 정립하는 계기가 됐다.

- 우리는 책의 파도에 몸을 맡긴 채


서점 주인 최대의 미덕이란, '독자의 취향을 고려해서 책을 추천하는 능력'이 아닐까 한다. 내가 어린 시절, 즉 인터넷 서점이 활성화되기 전만 하더라도 서점 주인은 책을 잘 아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상점의 주인에 가까운 성격을 띠기도 했다. 주로 동네 서점은 문제집을 잔뜩 취급하는 장소로 여겨졌으니 말이다.


하지만 인터넷 서점이 등장하고 소비자들이 점점 똑똑한 독서를 하게 되면서 역설적으로 서점 주인의 '큐레이터'로서의 역할은 매우 중요해졌다. 이는 내가 독립서점을 사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교보문고에도 문지방이 닳도록 주에 한 번 이상은 드나들지만, 길을 걷다 작은 서점을 보게 되면 꼭 들어가서 주인의 취향을 몰래 음미해보고는 한다. 인터넷 서점과 대형 서점의 데이터는 '인기 있는 책'을 추천해 주지만 '보석 같은 책'을 추천해 주지는 않는다. 무명작가의 신작, 독립출판물, 책방 주인의 정성이 들어간 추천사 같은 것들은 책방 주인의 큐레이션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작은 서점에서 훨씬 발견하기 쉽다.


2. 책을 선물한다는 것

원주 터득골북샵. 2022년.

부모에게 자식이란 언제나 '어린 나무'이므로, 다 자란 자식에게 책을 선물하려는 부모 또한 막대 하나를 들고 서점에 들어오는 셈이다. 단지 돕기 위해서. 자신의 '어린 나무' 위에 너무 많은 눈이 쌓이지 않기를. 자신의 '어린 나무'가 세상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그만 부러지거나 꺾이기 전에, 어깨에 짊어진 눈덩이를 조심스레 털어주기 위해서. 자신의 온몸으로 쏟아지는 눈 따위는 아랑곳하지도 않은 채.

- 우리는 책의 파도에 몸을 맡긴 채


한때 사람들에게 책을 선물하는 것을 취미로 삼았었다. 상대방의 상황에 따라서 그에게 필요한 위로의 말을 고민하고 섣부른 말 몇 마디를 고민하는 대신 정성스레 고른 책에 짤막한 메모를 넣어 건네고는 했다. 책 선물을 중단하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기술의 발전으로 전자책이 너무나 활성화된 것, 내가 '사회화' 되면서 상대방의 가치관을 고민하게 된 것 등이 있겠다. 어떤 책이든 그 안에는 작가의 메시지가 담기게 마련이다. 당연한 과학 지식을 풀어놓는 책이라고 하더라도 작가의 해석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어느 순간부터인지 다른 사람에게 책을 선물한다는 것이 다소 건방진 행위처럼 느껴졌고 혹여나 책 속의 메시지가 상대방의 견해와 어긋나지는 않는지 고민하게 되었다.


그래서 요즘은 원하는 사람에 한해서만 책을 추천해주고 있다.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꼼꼼히 듣고, 내가 읽은 수많은 책들 중 몇 가지를 추려낸 후 짤막하게 추천 이유를 덧붙인다. 그중에서 어떤 책을 고를지는 상대방의 선택에 맡긴다.


3. 책을 이야기한다는 것

아이들과 함께 읽는 책들

그때그때 출간되는 청소년 소설을 눈여겨봐 두었다가 손님에게 추천해드리는 일이 잦아지면서, '청소년 소설'이란 '성장 소설'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사실을 자연스레 깨닫게 되었다. 이야기가 끝날 때쯤 주인공은 어떤 의미로든 성장해 있었다. 나이를 먹고 목소리가 두터워진다는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이야기의 시작점에 서 있는 아이로부터 한 발짝 전진한다는 의미에서, 지금까지의 서툴렀던 자기 자신을 인식하고, 보다 성숙한 인간으로 발돋움한다는 뜻에서. 누군가의 자라는 과정을 목격했다는 것만으로도 그 성장에 대한 일말의 지분을 얻기라도 했던 걸까.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왠지 모르게 주인공과 더불어 나도 조금은 성장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 우리는 책의 파도에 몸을 맡긴 채


하지만 내게는 책을 추천해줘야 할 막중한 임무가 있는데, 세 개의 서로 다른 독서논술 수업을 진행하고 있는 탓이다. 첫 회사 인사팀장님께서 말씀하셨던 '돈을 받는다는 건 프로의 세계에 진입했다는 의미다.'라는 구절이 머릿속에 일종의 계시처럼 남아 있어서 일을 소홀히 할 수가 없다. 초등학교 저학년, 고학년, 중학생 대상 클래스를 진행하면서 아이들의 상황을 면밀히 파악하고 매주 새로운 책을 하나씩 골라낸다.


나는 이 과정을 도자기 굽는 일에 비유하고는 한다. 도자기를 구울 때에도 좋은 흙을 써야 좋은 도자기가 나오듯, 양질의 책은 아이들의 정서적 성장에 좋은 자양분이 되어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게는 '좋은 책'을 골라야 한다는 의무가 생긴다. 함께 읽을 책을 고를 때에는 베스트셀러 위주로 선별하기보다는 그때그때 아이들의 상황에 맞는 책을 선정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강아지 등 동물에 관심이 많은 아이에게는 동물의 시각에서 이야기하는 책을, 한창 재개발하는 지역에 살고 있는 아이들에게는 도시의 역사를 담은 책을, 생활 속 환경 문제에 관심 있는 아이에게는 환경 이야기를 담은 책을 소개하는 식이다.


어쩌면 내가 하는 일도 서점 주인의 그것과 닮아있는 것은 아닐까? 비록 나는 나만의 서점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책을 좋아하고, 책 이야기로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고, 책을 주제로 아이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나의 정체성 중 하나로 북 큐레이터를 조심스럽게 추가해도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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