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이 부러워하는 대기업, 그것도 전공을 잘 살린 인사팀을 퇴사했을 때 이 질문을 수없이 들었습니다. 그때마다 이런저런 이유를 대보았지만 딱 하나의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노동자의 날인 오늘은 제가 퇴사한 지 꼭 1년이 되는 날입니다. 1년 사이에 사업체를 설립하고, 유명 회사의 출제 위원이 되고, 대치동에서 강사로서의 커리어를 쌓아나가는 등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혹자는 이런 제 삶을 보고 '준비된 퇴사자'라고 하지만 그것은 아닙니다. 퇴사 후 '쌩신입'으로 더 나은 직장에 이직할 생각은 있었지만 사업을 할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흘러가는 대로 살다 보니 이렇게 되었습니다.
교육학에서는 아이의 발달 과정은 '역할모델'을 모방하며 이루어진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는 가까이 지내는 어른의 행동이 아이의 행동 양식에 큰 영향을 준다는 이야기입니다. IMF를 전후로 퇴어난 Z세대인 제가 봐왔던 주변의 역할모델들은 '대기업 취업'이 결코 행복한 삶으로 연계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소위 386세대라고 불리는 부모님 세대만 하더라도 회사에 취직하고 착실하게 돈을 모으면 집을 사고 가정을 꾸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Z세대인 제가 보는 사회는 생각보다 훨씬 더 가혹했습니다.
2008년 초등학생일 때에는 방관자의 입장에서 금융 위기를 목격했습니다. 갑자기 형편이 어려워졌다며 학원을 관두는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미술, 피아노, 컴퓨터 사교육만 받았으니 '주요 과목'이 아닌 사교육이 가정 내 긴축 재정의 대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어렴풋이 힘든 사람이 많구나 느꼈습니다.
2020년 코로나가 터졌을 당시, 저는 취준생이었습니다. SKY 대학에 입학하면 그래도 대기업에 가기는 한다는 말이 무색할 만큼 주변 친구들은 높아진 취업문 앞에서 무력했습니다. 2018년까지만 하더라도 공대를 졸업하면 별다른 스펙 없이도 주요 기업에 취업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코로나로 모든 기업들이 채용을 줄이는 과정에서 공대생들의 대거 미취업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운 좋게도 수월하게 첫 취업에 성공한 케이스였지만 면접 일정이 코로나 위기 단계가 격상됨에 따라 1주일씩 연기되던 당시의 상황은 불안정성 그 자체였습니다.
▶ Z세대의 역할모델
두 번의 금융 위기를 거치면서 저는 역할모델을 잃어버렸습니다. 집안의 자랑처럼 여겨졌던 '대기업에 다니고 서울에 자가가 있는 삼촌'은, 50대에 접어들어 언제 퇴사를 당할지 고민합니다. 삼촌의 입사 동기들은 두 번의 금융 위기 때에 뭉텅뭉텅 잘려나갔다고 했습니다. 평생직장이라는 말은 사전 속에나 나오게 된 셈입니다. 제 우상이었던 '초등학교 선생님 이모'는 옆 반 선생님이 아동 학대로 고소당했다고 말했습니다. 어린 마음에 갓 선생님이 된 이모를 따라다니며 초등학생 시절 6년 내리 생활기록부를 채웠던 '선생님'이라는 꿈은, 중·고교시절 학교 선생님들을 보며, 그리고 뉴스에 터져 나오는 교권 추락 기사들을 보며 지워졌습니다.
취업한 이후 회사에서 찾은 역할모델은 회사 일을 열심히 하면서도 회사 밖에서의 삶을 충실히 꾸려나가는 선배님이었습니다. 지금도 존경하고 자주 찾아뵙습니다. 아이를 키우는 동시에 회사에 휘둘리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서, 열심히 저축하고 부동산 공부를 열심히 해서 어느 정도의 경제적 자유에 이르게 된 분이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이 선배님은 회사의 일이 적성에 꼭 맞는 일이었고 회사 밖에서의 공부도 즐기는 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분조차도 일과 가정의 양립 사이에서 고민하고 계셨습니다. 다른 선배님은 코로나 때문에 아이가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이 늘어나자 돌봐줄 사람이 없어 어쩔 수 없이 퇴사했습니다.
▶ '워라밸'을 즐기기 위해 퇴사하나요?
뉴스 속에 묘사되는 Z세대는 '개인화된 자아'를 찾고자 퇴사하는 세대입니다. 이들은 일과 삶의 균형을 중시하고 사회의 발전에는 관심이 없는 것처럼 묘사됩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Z세대의 퇴사 이유는 훨씬 복잡합니다. 저는 이를 '현실과 이상의 괴리'로 설명하고 싶습니다. 우리 교육은 아이들에게 입시를 치르고, 좋은 회사에 들어가 안정적 삶을 누리는 것을 성공한 역할모델로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이런 교육을 받고 자란 아이들이 대학이라는 작은 사회에 나와 보면 대체로 충격을 받습니다. 대학이 취업을 보장해 주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시 조금 더 큰 사회인 회사에 들어가면 더 큰 충격을 받습니다. 회사에 들어가고 나면 안정된 삶을 살 줄 알았는데 이직과 퇴사가 유연화된 상황을 보면서 '교육받은 삶'과 '현실' 사이에 엄청난 괴리가 있음을 인지하게 됩니다. 사회·문화 교과에 등장하는 뒤르켐과 머튼 같은 사회학자들은 이런 혼란 상황을 '아노미 상태'로 정의합니다.
적어도 저에게는, 대기업 퇴사가 워라밸을 즐기기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사업자로 살아가는 지금의 삶이 훨씬 바쁩니다. 자영업자의 휴일은 돈을 내고 쉬는 것입니다. 자영업자에게 일과 삶의 경계선은 모호합니다. 언제 연락이 올지 모르기 때문에 핸드폰을 쥐고 사는 것이 현재의 삶입니다. 이것이 과연 '워라밸을 위한' 퇴사일까요?
▶ 자기배려적 자기계발 (김초롱; 2017)
최근 재미있게 읽은 논문이 있어 소개합니다. 이 논문에서는 대기업 청년이 퇴사 이후 '자기배려적 자기계발'을 통해 진로를 탐색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성공이란 산업화 세대나 386세대가 공유하는 가치인 '개인과 사회의 성장'이 아니라, '개인의 내적 성장'으로 그 초점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제가 경험한 괴리감도 이러한 시각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이미 사장되는 담론인 국가나 사회 공동체의 발전 대신 개인이 중요하다는 정체감이 형성되는 시기였기에 회사를 나와야겠다는 결심을 굳힐 수 있었습니다. 사회는 너무나 빠르게 변화하고 역할모델은 다면화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제시하는 역할모델 또한 변화해야 합니다. 10년 전 고등학생이었던 제가 가지고 있던 가치관과 20대 후반에 접어든 제가 지닌 가치관이 다르듯, 지금의 아이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에는 더 다양한 가치관이 혼재하는 사회가 될 것입니다. 그 속에서 주도적으로 자신의 삶을 꾸려나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먼저 사회에 나온 세대의 역할이 아닐까 합니다.
- 참고문헌 : 김초롱, 오세일.(2017).대기업 청년 퇴사자의 진정성과 자기계발.사회이론,(51),103-1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