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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끔 쓰는 이다솜 Oct 19. 2017

떠나지 않을 용기

여행에 전복되지 않는 일상을 살기


38일 동안 서유럽 4개국을 여행하고 돌아온 지도 6일이 지났다. 여행을 충분히 되짚어볼 시간도 없이 회사로 복귀했다. 출근하는 기분은 좋지도 싫지도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무것도 실감 나지 않았다. 여행을 떠났었다는 사실도, 돌아왔다는 사실도, 다시 출근한다는 사실도. 모두 다 너무나 생생한 현실이었음에도 말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고도 씁쓸하게, 금세 일상에 적응해버렸다.     


며칠 동안 TV에서, PC에서 정말 많은 여행 프로를 스치듯 잠깐씩 봤다. 심지어 홈쇼핑 채널에서도 관광 패키지를 팔았다. 다녀왔던 여행지가 나올 때는 반가움과 그리움을 느꼈고, 가보지 못한 여행지가 나올 때는 호기심이 생겼다. 출퇴근길에는 지하철 안에서 스마트폰으로 찍은 여행 사진을 다시 보면서 은은하고 부드러운 추억에 잠겼다. 이 사회에도, 나의 내밀한 세계에도 여행, 온통 여행이었다.     


자연스레 또 다른 곳으로 떠나고 싶어 졌다. 가보고 싶은 곳이 너무 많았다. 이 욕망은 지난 여행을 충분히 곱씹고 반추한 뒤에 나온 것이 아니었다. 여행을 권하고 예찬하는 환경으로부터 비롯된 충동에 가까웠다. 나 역시 SNS에 올린 몇 장의 여행 사진으로 누군가에게는 여행을 충동질하는 환경의 일부가 됐을 거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그렇게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다음 여행에 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깨달았다. 지금의 내게 필요한 건, 오히려 떠나지 않을 용기라는 것을. 앞뒤 생각하지 않고, 무작정 떠나는 일은 참 쉽다. 카드 값은 다음 달에나 청구될 테고, 돈이 부족하면 적금을 깨면 된다. 돈은 또 어떻게든 벌게 되겠지. 이렇게 안일한 생각은 얼마나 편리한가. 심지어 요즘에는 ‘욜로’라는 근사한 명분도 있어 오지랖 넓게 손가락질할 사람도 없다. 누군가는 대단하다고 말해줄 것이다. 엄마, 아빠는 철없는 딸을 보고 속을 끓이시겠지만.     


정말 어려운 건, 참는 일이다. 내가 처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응시하고, 더 나아가 몇 년 뒤의 커리어와 통장 잔고를 예상해보는 일이다. 매력적이고, 마치 모두가 수시로 떠는 것처럼 보이는 여행을 자제할 줄 아는 것이다. 적어도 충동적이고 즉흥적인 성향의 내게는 말이다.     


물론, 이번 여행은 과감하고 무모한 결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이는 인생에서 몇 번 찾아오지 않는 운이 좋은 경우였다. 한두 번이기에 가능한 일탈이었다. 이를 잊지 않으려고 애썼다. 금수저도 고액 연봉자도 아닌 내가 일단 지르고 보는 식의 여행을 계속 떠날 수는 없는 일이다. 돈을 모아 부자가 되고 싶은 건 아니다. 원한다고 해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행을 떠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려는 이유는 분명하다. 여행 때문에 돈에 끌려 다니고 싶지 않다. 돈을 좇으며 살고 싶지 않다. 이번 여행을 하면서 돈에 관해 새삼스레 많은 생각을 했다. 빠듯한 경비에 부실한 식사로 끼니를 때우거나, 산악 열차 타는 돈이 아까워서 3시간 넘게 산을 걸어 내려올 때는 돈이 뭔지, 참 더럽다고 욕을 하다가도 뒤돌아서는 돈이 있어서 이렇게 여행을 오고, 근사한 풍경도 볼 수 있다고 돈을 예찬했다. 또, 이렇게 넓고 멋진 세계가 있는데, 더 많은 곳을 가기 위해 돈을 더 열심히 벌어야겠다는 다짐까지 했다.     


그 순간, 아차 싶었다. 사람들의 인생에서 이런 식으로 돈이 가장 중요해지는구나 싶었다. 상상해봤다. 다음 여행만을 기다리며, 자발적으로 저녁 시간을 반납하고, 야근도 마다하지 않는 나의 모습을. 일이 아니라 돈 때문에 승진 욕심을 내고, 돈이 되는 재미없는 글만 쓰다가 화병으로 쓰러지는 나의 모습을. 악몽이었다.     


많은 사람이 다음 여행만을 기다리며, 일상을 견딘다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한다. 나 역시 큰 범주에서 보면 마찬가지다. 그게 나쁘다는 것도, 틀렸다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저마다 지켜내고 싶은 삶의 가치가, 경계가 있는 법이다. 내게는 ‘돈에 끌려 다니지 않는 것’이 그런 가치들 중 하나다. 여행을 사랑하지만, 삶을 촘촘하게 채우고 있는 일상을 흔들어버릴 정도는 아니다.     


현실에 치여 여행을 떠난 게 언제인지 아득한 이들에게 지금 당장 항공권, 아니, 기차표라도 끊으라고 감히 권하고 싶다. 그런데, 이제 막 여행에서 돌아온 나는 아니다. 당분간 참아야 한다. 항공권 프로모션 같은 키워드는 검색할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보다는 지난 여행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순간, 한 순간 되새겼으면 좋겠다. 아무리 좋은 책을 읽어도, 생각하지 않으면 내 것이 아닌 것처럼 여행도 마찬가지일 테니.

    

다시 일상을 살아갈 힘, 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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