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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끔 쓰는 이다솜 Nov 24. 2017

돈 없다더니 어떻게 여행을 갔어?

근래에 몇 번 이상한 경험을 했다. 이 이야기를 하려면 나의 소비 패턴에 관해 설명해야 한다. 검소하다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절약하려고 애쓰는 편이다. 올해로 일을 시작한 지 5년 차가 됐지만, 생활비는 대학생 시절보다 조금 늘어난 정도이니 나름대로 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무턱대고 돈을 안 쓰는 건 아니다. 다만, 가치 있다고 여기는 데에만 쓰려고 노력한다. 이를 테면, 한 달에 한두 번 이상은 극장에 가고 영화 스트리밍 서비스도 정기 결제하지만, 아깝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1년에 세 번 이상은 가까운 곳이라도 여행을 다녀온다. 회사에는 단출한 도시락을 싸서 다녀도 맛집에서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     


반면, 옷과 가방, 신발 등을 포함한 패션과 헤어, 화장품 등 미용에는 돈을 적게 쓰는 편이다. 좋아하는 책도 거의 사지 않는다. 어릴 때는 수집벽까지 있었지만, 어느 순간 책을 물질로 소유하는 일에는 회의를 느껴 아예 포기해버렸다. 최신형 스마트폰을 포함한 전자기기에도 욕심이 없다.       


이 같은 소비 습관이 자리 잡게 된 이유가 있다. 첫째, 돈을 별로 못 번다. 대학교를 졸업할 때부터 직장을 고른 제1의 기준은 연봉이 아니었다. 업계 자체가 연봉이 낮은 편이기도 하지만,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일과 삶의 균형이 보장되는 곳을 가장 원했기 때문이다. 대기업에 다니는 친구들처럼 돈을 쓸 수는 없었다.


둘째, 남 눈치를 안 본다. 상대적으로 남의 평가에 크게 관심이 없다. 특히 나의 이름 모를 브랜드의 가방이나 스마트폰 기종에 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지 않다. 내게 호감을 갖길 바라지만, 성품, 분위기, 실력처럼 돈으로 살 수 없는 알맹이에 관해서다. 외적으로는 남들보다 조금 후져 보여도 괜찮다고 여긴다.     


덕분에 조금이나마 돈을 모을 수 있었다. 대기업에 다니거나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나처럼 아끼지 않아도 쉽게 모았을 정도의 돈이지만. 고민 끝에 병곤과의 장기 여행을 결심했다. 지금이 아니면 떠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다녀온 여행이 지난가을의 38일 유럽 여행이었다.     

     



병곤과 내가 두세 달에 한 번씩 가던 단골 참치 집이 있었다. 우리에게는 가장 낮은 등급도 비싼 편이었지만, 질 좋은 참치가 무한 제공되기 때문에 기분을 내고 싶은 날이나 오랫동안 술을 마시고 싶을 때는 갈만 했다. 실장님은 유독 친절하게 대해주셨고, 좋은 부위도 많이 주셨다. 매번 제일 저렴한 등급을 천천히 먹는데도 눈치 보이지 않게 신경 써주셔서 감사하다고 하면, 아직 병곤이가 학생인데도 꾸준히 와주는 게 고맙다고 하셨다.     


여행을 떠나기 며칠 전에도 참치 집에 갔다. 여느 때처럼 실장님과 대화를 하다가 곧 한 달 정도 유럽으로 여행을 가게 됐다고 말했다. 갑자기 표정이 어두워지면서 너무 부럽다고 하셨다. 그런데,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장난일 거라고 여기면서 작은 선물이라도 사 오겠다고, 그러고 싶다고 했다. 실장님은 갑자기 정색을 하면서 선물은 됐고, 다음에는 조금 더 비싼 등급을 먹어 달라고 하셨다. 술에 취하셨던 것 같다. 유독 피곤해 보이기도 했다. 당황한 병곤과 나는 웃으면서 그러겠다고 했지만, 둘이 눈빛을 주고받으면서 알았다. 좋아하던 단골 술집을 하나 잃어버렸다는 것을. 그날 둘 다 술에 취한 채로 참치 집을 나와서 거리를 걸으면서 조금 서러워했던 기억이 난다.


여행을 다녀온 뒤에는 스킨케어 영업을 하는 분과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호기심이 생겨 들어보고 싶었다. 지난달에 관한 이야기가 나와서 또 어쩔 수 없이 여행 이야기를 하게 됐는데, 그분의 눈이 빛났다. 자신의 삶에 투자하는 만큼 외모도 잘 관리할 것 같다면서 한 달에 5~10만 원 꼴로 1년 동안 받을 수 있는 스킨케어 프로그램을 권하셨다. 상품은 나쁘지 않았지만, 미용에 쓰고 있는 지출 범위에서 초과되기 때문에 한 번에 결정할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다. 큰 금액을 바로 결제한 적도 없다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다시 여행 이야기를 꺼내면서 설득하셨다.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서툴러도 최선을 다하는 분 같아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여행과 스킨케어를 계속 연결 짓던 부분은 뒤돌아서 다시 생각해도 좀 이상하긴 했다.

     

이렇게 내가 만난 몇몇 사람은 한 달 정도 유럽에 다녀올 정도면, 다른 부분에도 어느 정도 돈을 더 써야 한다거나 쓸 수 있을 거라고 믿는 것 같았다. 하지만, 물가가 비싼 곳으로 오랫동안 여행을 다녀왔다고 해서 평소에도 비싼 음식을 마음 놓고 사 먹거나 정기적으로 스킨케어를 받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집안이 좋지도 않고, 연봉이 높지도 않다. 앞으로 계속 돈을 벌겠지만, 목을 맬 생각은 없다. 이런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아가려면, 관심 없는 부분에는 과감하게 지출을 줄일 수밖에 없다. 매일 돈이 없다더니 어떻게 여행을 다녀왔냐고 물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아꼈기 때문에 다녀올 수 있었다.     


돈이 없다는 말은 말 그대로 돈이 없다는 뜻으로도 쓰이지만, 덜 중요하다고 여기는 부분이기에 돈을 쓰고 싶지 않다는 의미도 있다. 두 가지 다 해당되는 경우도 많다. 또, 아무리 생각해도  “이 나잇대, 이 연봉에 이 정도는 써야지”라는 건 없는 것 같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허리띠를 졸라매면서도 여행에, 패션에, 굿즈에 돈을 쓰고 있을 것이다. 언제나 좋아하는 일에 쓸 돈은 있는 법이니까. 돈이 없어도 장기 여행을 다녀올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이 당당하게 자신의 욕구와 가치에 따라 돈을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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