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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망 Jun 18. 2022

엄마와 서울 야경

엄마를 모시고 야경을 보러 갔다. 막막하기만 했던 서울 생활도 벌써 20년이 넘었다. 생애 반 이상을 서울에서 보내는 동안 엄마와 야경을 본 건 처음이다. 야경을 즐기는 건 여유가 필요한 일이다. 시간, 밤에 나갈 수 있는 체력 등등. 무엇보다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하는데 그동안 엄마는 밤늦게까지 바빠서 밤에 외출하는 건 쉽지 않았다. 요즘엔 일찍 퇴근하셔서 여유가 있다.


글쓰기 모임 멤버들과 갔던 인왕산 초소책방에 대한 기억이 좋아서 그곳으로 향했다. 8시쯤 반쯤 출발해서 9시경에 도착했다. 초소책방에는 10대 정도 차를 주차할 수 있는 주차장이 있는데 평일 저녁이라 당연히 한가할 줄 알았다. 웬걸. 두 자리만 비어 있었다. 이중, 삼중으로 주차가 되어 있어서 중간에 나와야 할 것 같았다. 그래도 자리가 있는 게 어디냐며 차를 대고 카페에 들어갔다. 밤이라 카페인 음료를 못 마시는데 청 음료가 마감되었다. 지난번에 생강차가 참 맛있었는데. 어쩔 수 없이 초콜릿 우유를 주문했는데 진한 초코가 쌀쌀한 날씨와 잘 어울려서 다행이었다.


엄마와 자주 만나지만 주로 대화 주제는 조카들이다. 주 3회 조카들과 수학 공부를 하는데, 그때마다 아이들의 학습 습관, 과제 태도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하지만 집을 벗어나면 다른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처음 서울에 왔을 때 고생했던 일, 함께 다녀왔던 여행지, 그때 먹었던 음식, 인상 깊었던 장소, 재밌었던 일 등등.


일 년 정도 물이 새서 곰팡이가 가득한 아파트 1층에 살았는데, 엄마가 "너는 그때 같이 안 살았잖아?"라고 해서 웃음이 터졌다. 작은 전세금을 마련하는 것도 어려웠던 때라 따로 살고 싶어도 불가능했었다. 그때 엄마는 주중에는 다른 곳에서 일하고 주말에만 그 집에 오셨다. 그 집에 있는 내가 그려지지 않고 까마득하다고 하셨다. 이상하게도 나 역시 그 집의 풍경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그런 시기를 지나 엄마와 나란히 앉아 아경을 보며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는 그 시간이 참 좋았다.


지난 겨울에 초소책방에 왔을 때는 야경이 넓게 보였는데 이번에는 나무에 가려져서 작게 보였다. 좀 더 멋진 야경을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아쉽다. 다음에는 남산을 가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독립문을 지나쳤는데, 알고 보니 엄마가 19살 때 초등학생인 친척 오빠 둘을 데리고 서울에 올라와 살았던 곳이었다. 서대문 형무소 맞은편 기와집에 사셨다는데 지금은 높은 아파트가 들어섰다. 이모와 이모부는 어떻게 어린아이들을 서울로 유학 보낼 생각을 하셨을까. 19살이면 아직 어린데 두 조카들을 돌보며 살림을 꾸린 엄마도 대단하다. 오빠들을 케어하느라 직장을 다닐 수가 없어서 오빠들이 학교에 가고 심심할 때면 인왕산을 올랐다고 하셨다. 다음에는 엄마의 추억을 따라 인왕산을 등산해야겠다.


거의 매일 만나는 엄마지만 이렇게 외출을 해야 진짜 대화를 나누게 된다. 바람은 차가웠지만 포근했던 날. 또 다른 어느 날 '우리 그때 야경 보면서 참 좋았지'라고 추억하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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