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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망 Jun 11. 2020

일과 나 ('9번의 일'을 읽고)

1. 

개인의 정체성과 상관없이 번호로 불리는 ‘9번’이 담당하는 일, 그게 무엇일까. 어떤 '9번'의 이야기가 펼쳐질까. 기대하며 읽었다. 30여 페이지를 읽었을 때는 ‘끝난 사람’이라는 소설이 떠올랐다. ‘끝난 사람’은 쉰 하나에 충성을 다하던 회사에서 버림받은 남자의 생활을 생생하게 그려낸 책이다. 그 소설처럼 이른 나이에 퇴사하게 된 주인공의 이야기가 펼쳐질 줄 알았는데 ‘9번’은 끝까지 억척스럽게 회사에 남는다. 책장을 덮었을 때는 ‘82년 생 김지영’의 노동자 버전처럼 느껴졌다. 회사에서 밀려나는 사람들이 겪을 법한 일들을 종합 선물세트처럼 풀어놓고 있는데, 이런 일들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평범한 사건이라는 사실이 너무나도 답답했다. 


2.

주인공은 수리와 설치, 보수 업무를 담당하는 통신 회사 현장 팀에서 26년간 일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시골 어머니의 집을 수리해 주고 장인의 병원비를 댄다. 노후를 위해 낡긴 했지만 다세대 건물도 구입했다. 집값의 반 이상을 대출받고, 네 가구의 임대를 떠안는 조건으로 건물을 샀기 때문에 매달 대출금 이자와 원금을 성실히 갚아야 한다. 그런 그에게 이런저런 이유로 인원감축을 단행하며 퇴사를 요구하는 회사의 입장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에게는 ‘새끼 고양이처럼 연약하고 자그마하던 회사가 지금처럼 큰 기업으로 성장했다는 데에 비밀스러운 자부심과 동료 의식(p.4)’이 있었다. 


여러 번의 퇴사 요구를 모른 척하며 회사에 소속되어 일할 수 있는 시간을 힘겹게 연장해 나간다. 출퇴근에만 세 시간이 넘게 걸리는 거리의 교육센터로 출근하라는 지시를 받았을 때도, 최하위 점수로 교육을 마친 뒤 퇴사 압박을 받을 때도, 상품 판매 부서로 발령을 받아 개인에게 인터넷 판매가 어려운 지역으로 영업을 다니게 되었을 때도 회사에 남기로 한다. 지금까지 성실하게 일했으니 앞으로도 열심히 일하면 회사에 남을 수 있을 거라고 믿으면서. 하지만 주인공이 아무리 발버둥 치고 노력해도 회사는 주인공을 내보내려는 목적을 숨기지 않는다. 영업을 하면서 행한 사소한 호의와 친절까지 잘못으로 평가하며 비난하는 회사 앞에서 주인공은 모욕감과 모멸감을 느낀다. 그 호의와 친절이 문제가 되어 다시 지방 소도시 시설 1팀으로 발령이 난다. 사택을 제공한다는 약속과 달리 그곳에는 주인공이 머물 사택이 남아 있지 않았다. 한 사택에 잡동사니를 보관하는 방을 얻어 머물면서 그곳에서도 성실하게 일하지만 곧 출퇴근 명부에서 이름이 삭제되고 대기 발령 상태가 계속된다. 


노조에 가입하고 반년 뒤 본사의 연락을 받아 하청업체 소속으로 일하게 되었다. 현장 업무가 완료되면 본사 소속으로 복귀한다는 조건이 붙은 계약서를 받아들인 것이다. 78구역 1조 9번. 하청업체 소속으로 일하게 되면서 받게 된 소속과 이름이다. ‘9번’으로서 해야 할 일은 지방에 통신 철탑을 설치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더 이상 그런 것들을 고민할 필요가 없다고 결론 내렸다. 그러자 더 이상 중요한 것은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다. 못 할 게 뭐 있나. 다 하는 거지. 하는 데까지 해 보는 거지. p.256”


마을 사람들이 왜 통신 철탑 설치를 반대하는지, 왜 함께 일하던 동료들이 그곳을 떠나는지 ‘9번’은 궁금하지 않았다. 통신 철탑을 세우면서 자신을 잃고,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잃고, 소중한 사람에 대한 관심도 모두 잃고 오로지 일에만 몰두했다. 옳고 그름의 판단은 내려놓고 자신의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떤 것이라도 했다. 


“다만 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이 언제까지 이 일을 계속할 수 있는지, 그래서 마침내 닿게 되는 곳이 어디인지.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거기까지 이르러야만 이 기이한 집착과 이상한 오기를 모두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p.313"  


그렇게 끝까지 달려서 마주하게 된 것은 ‘흉물스러운 것 (p.315)’, ‘복직이 되었다 하더라도 어차피 이처럼 긴 시간을 보장받을 수 없었을 거라는 본사 담당자의 대답 (p.320)', ’완곡한 거절 (p.320)‘과 ’차일피일 약속을 미루는 인사 담당자를 기다리는 일 (p.322)'이었다.  


3. 

주인공이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자주 답답했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의 비난과 멸시, 회사에서 받는 불쾌함과 부당함을 모두 모른 척하고 왜 이렇게까지 자신을 극단으로, 끝으로 몰고 갔던 걸까. 


“회사를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가 다만 경제적 어려움 하나뿐이라고 생각하는지, 26년간 회사와 자신을 이어주던 게 겨우 얄팍한 월급 통장 하나뿐이라고 여기는지 그는 되묻고 싶었다. p.36" 


주인공이 회사에 남기로 결정한 것은 월급 때문만도 아니었다. 인격을 무시하면서까지 자신을 내보내려고 하는 회사에게 무엇을 기대한 걸까. 자신이 회사를 키우는데 일조했으니 회사도 자신을 보호해주고 남게 해 줄 거라고 믿었던 것일까. 평생 일에만 매달려 자신이 어떤 일을 하는지, 내가 하는 일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하지도 않고 생각하려고 하지도 않는 사람의 끝을 보는 것 같아서 안타까웠다. 


학원에서 일할 때는 쉽게 학원의 목표에 휩쓸린다. 학생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특성을 무시하고 모두를 하나의 틀 안에 끼워 맞추려고 한다. 학원을 그만둔 뒤에 천천히, 조금씩 깨달았다. 내가 얼마나 자주 아이들을 닦달하며 괴롭혔는지, 숨 막히게 빠른 진도가 아이들에게는 얼마나 유해했는지를. 아이들이 제대로 이해할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고 무작정 문제풀이를 시키는 것은 수포자를 만드는 지름길이었다는 것을. 다시는 학원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자주 다짐한다. 


“처음부터 이 길고 긴 싸움을 시작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이런 무모한 싸움이 아니고 다른 어떤 것에 이처럼 긴 시간과 노력을 쏟았어야 했다는 자책이 밀려왔다. 자신은 처음부터 이런 싸움을 감당할 만한 사람이 아니고, 지금껏 자신이 한 일은 패색이 짙은 이 싸움을 끝없이 유예하면서 다만 지는 것을 미뤄왔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p.324"


주인공도 일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시간에서 벗어나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자신의 일이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가 있었다면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패색이 짙은 싸움을 하며 지는 것을 미뤄왔던 그는 자신이 단단하게 조여 놓은 너트를 ‘하나씩. 천천히.' 분리한다. 더 이상 일이 자신을 무너뜨리지 않도록 '자신이 세워 올린 것을 무너뜨린'다. 




이북(전체 페이지 333)으로 읽어서 인용문의 페이지가 종이책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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