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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망 Dec 24. 2022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김초엽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김초엽 작가의 SF / 판타지 소설이다. 일곱 편의 짧은 소설을 담고 있다. 아무리 재밌는 책이라고 해도 한두 편은 시큰둥하기 마련인데 일곱 편이 모두 흥미롭다. 놀라운 상상력을 기반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인데, 왠지 가까운 미래에 실현될 것 같은 생생함이 담겨있다. 


무엇보다 신선했던 것은 고도로 발달한 미래를 엿보는 듯한 스토리 안에, 소외받는 이들이 겪는 차별과 슬픔을 녹여내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사회를 배경으로 소외와 편견, 차별 등을 생생하게 그린 작품은 등장인물들의 고난이 너무 가깝게 느껴져서 읽는 것이 괴롭다.  다양한 사회적 문제를 만나면 마음이 아프고 속상하지만 '내가 무얼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무기력해진다. 책을 읽을 때는 '뭔가 해야지'라고 다짐하지만 실천하지 않는 스스로에게 실망하기도 한다. 그래서 사회 문제를 다룬 책을 읽는 것을 주저하게 되는데, 이 작품은 비슷한 문제를 녹여내고 있음에도 받아들이기가 편했다. 물론 책장을 덮은 이후에는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지만, 책을 읽는 동안에는 심적인 부담을 덜 수 있다는 것이 꽤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동시에 책에서 그려지는 것처럼, 과학기술이 급성장한 미래에도 소수에 대한 차별과 멸시가 만연할 거라고 가정한다면, 차별 문제는 기술 발전보다 인간의 감정적 성숙이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2년 전 처음으로 사회 문제에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때는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1년만 관련 책을 읽으면 사고가 바뀌고 무언가 행동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지나고 보니 사회 문제를 대하는 태도와 가치관은 잠깐의 관심과 독서만으로 바꿀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하고, 작은 일부터 행동하며 시간을 쌓아야 하는, 장기적인 프로젝트다. 자주 만나게 되는 무기력이나 죄책감 등과 정면으로 마주하며 내면을 단단히 하고, 조금씩 바꿔가야 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첫 장을 넘기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게 된다.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미래 사회를 그려내고, 그 안에 현실 문제를 투명하게 담아내는 매력적인 작품이다. 




p.13 어쩌면 일상의 균열을 맞닥뜨린 사람들만이 세계의 진실을 뒤쫓게 되는 걸까?


p.45 지구에 남는 이유는 단 한 사람으로 충분했을 거야. 


p.69 처음으로 잘 자라는 인사를 하고 깔개 위에 몸을 뉘었을 때 희진은 문득 울고 싶었다. 고작 그 정도의 말을 건네는 것만으로도 누군가를 더 소중하게 여기게 된다는 사실을 예전에는 몰랐다. 


p.88 류드밀라가 기억하는, 류드밀라가 가보았던, 류드밀라가 창조한, 류드밀라가 일관적으로 그려내는 분명한 세계. 


p.99 사고는 언어 이해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다. 


p.159 우리는 점점 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갈 뿐인 게 아닌가. 


p.179 농담하듯 가볍게 하려고 했던 말이 입 밖으로 나가는 순간 날카로운 어조가 되어서 나조차 흠칫했다. 


p.188 소비가 항상 기쁨에 대한 가치를 지불하는 행위라는 생각은 이상합니다. 어떤 경우에 우리는 감정을 향유하는 가치를 지불하기도 해요. 이를테면, 한 편의 영화가 당신에게 늘 즐거움만을 주던가요? 공포, 외로움, 슬픔, 고독, 괴로움…… 그런 것들을 위해서도 우리는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죠. 


p.189 의미는 맥락 속에서 부여된다. 하지만 때로 어떤 사람들에게는 의미가 담긴 눈물이 아니라 단지 눈물 그 자체가 필요한 것 같기도 하다. 


p.234 정확히 누구를 원망하고 싶은 것인지도 이제는 알 수 없었다. 지민은 그냥 누군가를 향해서 화를 내고 싶었다. 


p.291 어쩌면 폐기해야 할 것은 소수자들의 신체적 결함이나 질병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극복해야 할 것으로 규정하는 정상성 개념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p.293 타자를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불가능 속에서도, 우리는 서로를 놀라워하고 또 아름다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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