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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망 Jan 05. 2023

오래오래 기억될 시간

명동교자 칼국수

임신 기간 동안 특별히 먹고 싶거나, 갑자기 먹고 싶었던 음식이 별로 없었다. 밤늦게 생각나는 게 있어도 24시간 운영하는 마트에서 사 오거나 새벽 배송을 시키면 다음 날에는 먹을 수 있었다. 내편은 '아내가 임신하면 한밤중에 뛰어나가 먹거리를 사 오는 일'이 잦을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인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닭 육수를 내서 만든 칼국수는 어느 날 오후 쇼핑을 마치고 명동교자에서 점심을 먹었던 때로 데려다주었다. 줄이 얼마나 길던지 계단을 하나 다 채우고도 문밖으로 나와 건물을 한 바퀴 휘감을 때까지 이어졌다. 그 집 칼국수는 진한 소고기 육수와 전분기 많은 국수 때문에 국물이 어찌나 걸쭉하던지 젤리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엄마는 그 집 특유의, 마늘이 듬뿍 들어간 김치를 자꾸만 더 달라 했고, 이모는 공공장소에서 코를 푼다고 엄마를 야단쳤다. <H마트에서 울다> p.354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다가 일어나서 꺼내 든 책에서 명동교자 칼국수 얘기가 나왔다. 칼국수는 좋아하는 음식이 아니다. 두껍고 투박한 면보다 얇은 면을 선호해서 잔치국수를 좋아한다. 그래서 칼국수 전문점에 가도 만둣국을 먹는다. 그런 내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칼국수는 명동교자 칼국수다. 수많은 명동 칼국수가 있지만 명동에 있는 명동교자 칼국수와 비슷한 맛을 내는 곳은 별로 없다.


갑자기, 당장 명동교자로 달려가 칼국수를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동네에 명동교자와 비슷한 맛을 내는 칼국수 집이 있는지 검색하기 시작했다. 몇 군데를 찾았는데 사진과 리뷰를 보니 달랐다. 비슷하지만 부족한 맛이라는 평을 보며 명동에 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다음 날 명동으로 달려가는 것. 명동은 내편 근무지와 가깝다. 내편이 퇴근하는 시간에 맞춰 가면 함께 저녁을 먹을 수 있다. 명동교자 칼국수를 꿈꾸며 잠이 들었다.


다음 날 내편에게 명동교자 칼국수를 먹고 싶다고 했더니 저녁으로 먹자고 했다. 혹시 엄마도 힘들지 않으시면 같이 오는 게 어떠냐고 권했다. 늦은 시간에 지하철을 타고 이동해야 해서 엄마가 피곤해하지 않을까 염려했는데, 엄마는 흔쾌히 좋다고 하셨다. 명동교자에는 처음 가본다고 하셨다.


종일 명동교자에 갈 생각에 들떴다. 조카들과 공부하고 아이들을 태권도 학원에 보낸 뒤에 엄마와 지하철을 탔다. 집에서 명동까지는 열 두 정거장이다. 지하철은 텅텅 비어있었다. 자리를 잡고 앉아 엄마와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충무로역에 도착했을 때 내가 엄마에게 '명동은 충무로에서 한 정거장이에요'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잠깐 이야기를 하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숙대 입구였다. 명동을 지나쳐 세 정거장이나 이동했다. 이게 무슨 일인지. 심지어 명동 다다음 역인 서울역을 지나치며 "서울역차병원(난임 센터)에 다닐 때 너무 고생스러웠어요"라는 말까지 했다.


엄마와의 편안한 수다에 빠져, 따뜻한 의자에 몸을 맡긴 채 세 정거장이나 지나쳐왔다는 게 너무 웃겼다. 얼른 내려서 명동으로 돌아갔다. 내편은 일찍 도착해서 명동교자에서 대기 중이었다. 제대로 내렸다면 시간이 딱 맞았을 텐데. 부지런히 걸어서 명동교자로 갔다. 너무 오랜만에 명동에 갔더니 길을 헤맸다. 금세 갈 수 있는 길을 돌고 돌아 명동교자에 도착했다. 평일 저녁인데도 대기 줄이 길었다. 내편이 먼저 기다렸다가 입장했고, 엄마와 내가 도착했을 때 막 칼국수가 나왔다.



명동교자 칼국수는 닭 육수를 내어 만든다. 내가 좋아하는 얇은 면에 전분기가 가득해서 국물이 걸쭉하다. 귀여운 만두 4개와 소고기 고명이 가득 올려져 나온다. 젓가락으로 국수를 한껏 집어 올려 얼른 입으로 가져갔다. 그래, 이 맛이다. 전 날밤부터 그려왔던 따뜻하고 구수한 칼국수가 입안을 돌다 식도를 타고 내려가 뱃속을 따뜻하게 데웠다. 허겁지겁 먹기 않기 위해 진한 국물을 떠먹었다. 마늘향이 가득한 매콤한 김치는 입맛을 돋우었다. '맛있어'를 연발하며 한 그릇을 뚝딱 비웠다.


식사를 마치고 나와 집으로 향하는 지하철을 탔다. 오로지 칼국수 한 그릇을 먹기 위해 세 사람이 명동까지 나왔다는 게 재밌어서 웃음이 났다. 밤새 명동교자 칼국수를 그리며 입맛을 다시고 뒤척인 시간, 엄마와 지하철을 타고 멍하니 있다가 내릴 역을 지나친 일, 흡족하게 식사하던 순간, 활짝 웃는 얼굴로 지하철을 타고 집에 돌아오던 시간. 아무래도 이 시간들은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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