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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망 Oct 24. 2020

벽 이야기

넌 어때?

나도 비어 있을 때가 있었어. 아무것도 없다고 느낄 때가 있었지. 구름과 별들이 노니는 하늘, 시시각각 변하는 나무들, 찰랑찰랑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한 놀이터, 다양한 표정의 사람들. 모두가 부러웠어.


어느 날 참새 한 마리가 찾아왔어. 너무도 반가웠단다. 늘 심심했거든.

참새가 그러더라.


‘너는 정말 넓구나. 그림을 그려도 될까? 그림 그리기가 유행이야’


정말 그랬어. 동네 여기저기에 있는 친구들은 벌써 몇 개의 그림을 품기 시작했거든. 나는 고민했어. 하늘처럼, 나무처럼, 시시각각 풍경이 바뀌는 놀이터처럼 정말 멋진 것을 담고 싶은데.. 정말 멋지고, 입이 떡 벌어지는 무언가를 담고 싶은데 그게 무엇인지 모르겠더라고. 제안은 고맙지만 거절했어. 괜히 참새들의 어설픈 그림으로 채웠다가 조잡하고 마음에 안 들면 어쩌나.. 걱정이 됐거든. 참새는 크게 실망했어. 나만큼 멋진 곳은 없대. 아쉽지만 어쩌겠어.



며칠 뒤 참새가 다시 왔어. 좋은 곳을 찾아서 친구들과 그림을 그리며 신나게 놀았대. 나보다 좁고 구석진 자리에 있어서 햇볕도 가끔 찾아가는 곳이지만 그 녀석이 흔쾌히 자리를 내주었다는 거야. 공간을 내어준 그 녀석도 정말 좋아했대. 엄청나게 재미난 일이 될 거라면서 그림을 그리게 해 달라고 조르더라고.


흥.. 그럴 리가. 분명 구석진 자리에 있다는 그 친구는 그림이 마음에 안 들었을 거야. 고작 참새들이 그리는 그림이 얼마나 멋있겠어? 나는 더 멋지고 아름다운 무언가를 담고 싶어.


봄을 지나 나뭇잎이 무성해지는 더운 여름이 되었지. 참새는 자주 찾아와서 그림을 그리며 놀자고 했어. 세상에, 염치도 없지. 참새의 그림을 담은 친구를 알게 되어 슬쩍 봤는데 역시 별 거 없더라고. 발자국과 날갯짓으로 스친 그림들, 별로였어. 발자국이 조금 귀엽기는 했지만.


나는 정말 멋지고 대단한 무언가를 담고 싶어. 귀여운 발자국 몇 개가 아니라.


며칠 뒤, 시끌벅적한 일이 있었어. 크레파스를 잔뜩 든 꼬마들이 친구 앞에 모여 얼룩덜룩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 거야. 휴. 다행이야. 하마터면 내 몸에 완성되지 않은 꼬마 녀석들의 그림이 그려질 뻔했잖아.


그런데 이상하지.. 나는 계속 그 자리에서 빈 채로.. 그대로인데, 무엇을 담고 싶은지 고민하면서 눈만 높아지는데 구석에 있는 친구는 얼룩덜룩했다가 온통 하얀색으로 칠해졌다가 다시 알록달록한 무언가로 차츰차츰 채워지는 거야. 흠.. 이제는 좀 그럴싸한 그림이 되었어. 좋아 보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나는 저것보다 더 멋진 무언가를 담을 거야. 분명 그런 게 있을 거야.


자리를 내어 달라고 조르던 참새도 이제 포기했나 봐. 나의 자리를 참새들에게 내어줄 수는 없다고 분명히 말했거든. 참새의 첫 방문을 받아준 친구는 점점 예뻐졌어.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알록달록 멋진 모습이 되었어. 조금은 귀여웠던 참새들의 발자국도 왠지 빛나 보였어. 사람들이 친구와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했어. 흥.. 두고 봐. 언젠가는 내가 더 굉장한 것을 담아서 인기쟁이가 될 테니까.


그렇게 또 한 계절이 지났어. 단풍이 흩날리는 가을이 되었지. 사실 이제 인정할 수밖에 없겠어. 친구의 모습이 알록달록 예쁜 단풍 같다는 걸 말야. 나무들과 어우러져서 참 아름답더라. 슬펐어. 나만 그대로야. 참새에게 자리를 내어줄까? 하지만 안 돼. 난 정말 멋지고 멋진 것을 담고 싶단 말야. 고작 참새들의 발자국을 담을 수는 없어. 마음을 다잡았어.


가을 내내 친구는 들뜬 사람들과 사진을 찍기 바빴어. 일부 공간은 흰색으로 덮이더니 놀이터의 풍경을 꼭 닮은 아이들의 모습으로 채워졌지. 유명인사가 된 모양이야. 왁자지껄 신나게 노는 친구를 볼 때마다 점점 초조해졌어.


어느 순간부터 이사를 가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놀이터에 놀러 오는 아이들이 줄어들었어. 알록달록 예쁜 친구 앞에만 사진기를 들이댄 사람들이 몰려 있었지. 나에게도 저 녀석처럼 주목받을 날이 올까. 세상은 예쁘지만 나는 우울하고 쓸쓸한 가을을 보내고 겨울이 되었어. 참새가 가끔 찾아와서 말동무가 되어 주었어.


놀라운 소식을 들었어. 이 동네가 철거된다는 거야. 나는 아직 무엇을 담을지 정하지도 못했는데?


얼마 뒤, 슬프게도 나는 빨간 잉크로 휘갈겨 쓴 ‘철거’라는 글씨를 담게 되었어. 아.. 이제 너무 늦었어. 아직 어떤 그림이 좋을지 정하지도 못했는데 이대로 모든 것이 끝났어.



참새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어땠을까?

무언가 멋진 것, 예쁜 것을 구상하기보다 일단 무엇이든 시작했더라면 어땠을까. 시작을 해야 어떤 그림이든 그려지고 빈 공간이 채워지고 가꿔진다는 것을 몰랐어. 처음엔 못 마땅해 보이던 친구의 자리는 채워지고 지워지고 다시 채워지면서 멋진 공간이 되었는데..


다시 돌아가고 싶어. 고민하고 걱정하고 더 멋진 것을 찾아 헤매는 시간에 이것도 담아보고 저것도 담아 보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더라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지금처럼 후회만 가득하지는 않을 텐데.. 참새와 아이들과 함께 한 즐거운 추억으로 한껏 흐뭇할 텐데.. 내게 남은 건 고민하고 평가하고 판단하고 부러워했던 기억뿐이야. 정말 이렇게 될 줄 몰랐어.


넌.. 넌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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