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희망 Oct 30. 2020

나는 암기를 못해

나에 대한 오해

국민학교 1학년 땐가.. 학교에서 교과서를 받는데 새 책이 부족했다. 담임 선생님이 ‘국민교육헌장’을 암기하는 순서대로 새 교과서를 나눠주겠다고 했다. 국민교육헌장이 대체 뭐야?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한참을 외워도 아무리 외워도 외워지지가 않았다. 두 페이지나 되는 분량을 대체 어떻게 외우라는 거야. 놀랍게도 친구들은 참 빨리 외웠다. 한 반에 학생 수가 40명이 넘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새 책이 동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나는 반도 외우지 못해서 쩔쩔매고 있는데 말이다. 그 순간의 분위기, 나만 쩔쩔매고 있는 것 같은 기분, 사라지는 새 책을 보며 조마조마하던 기억, 결국엔 포기하게 되던 순간. 나는 꼴찌로 헌책을 받았다. 그 날 나는 확신했다. ‘나는 암기능력이 없다.’ 못한다도 아니고 없다라니.


나는 한 해 일찍 국민학생이 되었는데 서류가 잘못되어 수정하느라 입학식에 참석하지 못하고 며칠 뒤에 들어갔다. 유치원에 다닐 때까지는 ‘암기’라는 걸 해 본 적이 없다. 아버지의 직장이 시멘트 회사였고 시멘트 산업 특성상 사택이 산속에 있다. 부모님이 억지로 공부를 시킨 적도 없어서 산과 놀이터를 뛰어다니며 논 기억뿐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외우려고 노력한 것이 하필 ‘국민교육헌장’이라니. 재미도 없고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고 새 책은 눈앞에서 사라지고.. 꽤 충격적인 일이었다.


중고등학교 때는 ‘못한다’에서 ‘싫어해’로 마음을 고쳐먹고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이해가 중요하지, 암기는 주입식 교육의 폐해라고 우기면서 외우는 것에서 점점 멀어졌다. 꼭 외워야만 시험을 치를 수 있는 영어 단어도 외우지 않으려고 갖은 노력을 다 했다. (그 노력으로 좀 외우지...) 고등학교 때 인기 많은 국사 선생님이 있었는데 자꾸 암기를 시켜서 싫어했다. 아니, 재밌게 이야기로 이해하면 됐지 웬 암기, 라면서.


학원 강사로 일하면서 1시간 분량의 수업 내용을 몽땅 외워야 했다. 심히 괴로웠다. 암기하는 거 너무 싫은데.. 실은 못하는데 과연 해 낼 수 있을까. 다행히 암기보다 아이들에게 무지를 들킬까 봐 두려운 마음이 더 커서 밤낮으로 외웠다. 외우고 외우고 무식하게 계속 외웠다. 읽고 또 읽고 쓰고 또 쓰고, 집에서 전철에서 소리 내어 외웠다. 처음에는 1시간 수업을 공부하고 완전히 외우는데 한 달이 걸리더니 시간이 지날수록 암기하는 기간이 짧아졌다. 5년 차쯤 되었을 때는 하루면 다 외웠다. 초반에는 수업의 첫인사부터 마무리까지 철저하게 대본을 짜서 외웠는데 나중에는 키워드만 잡아 놓고 수업 중에 살을 붙이는 것도 가능해졌다. 그때 어렴풋이 느꼈다. 암기력이든 강의력이든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계속 연습하면 좋아질 수 있다는 것을.


인간의 뇌는 가변적이다. 지각을 변형하고, 새로운 신경 연결을 형성하고, 다르게 생각하도록 훈련할 수 있다. (우아한 관찰주의자 p.346)

유아기 숙명주의는 사람들로 하여금 유아기의 경험은 지워지지 않는다는 가정을 하게 함으로써 사람들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물론 극단적인 경우에 사람들은 그렇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반드시 알아야 할 사실이 있다. 인간의 뇌는 평생 동안 얼마든지 유연하게 바뀔 수도 있다는 점이다. (승자의 뇌 p.357)


라푼젤 대본을 암기하면서도 여전히 ‘나는 암기를 못해’라고 생각할 때마다 움찔한다.

'못하는 게 아니지. 무언가를 외우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시간이 필요한데 충분히 시간을 들여서 외우지 않으니 안 되는 거지. 내 타고난 능력 탓이 아니다. 암기를 잘하는 사람들도 반드시 시간을 들여서 노력한다. 한번 보고 외우는 사람은 없어.'

아직은 스스로를 설득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다행히, 당연히 암기력이 향상되었다. 라푼젤 대본을 두 번째 외우고 있는데 의외로 기억나는 것이 많아서 스스로에게 놀라는 날이 많다. 한글 해석은 반 정도 생각나는데 그것도 당연하다. 처음 외울 때 한글 해석은 두세 번 본 것이 전부니까.

 

처음 암기를 해 본 아이가 암기 능력은 타고나는 거라고 급히 결론 내리고 좌절한 탓에 학창 시절 내내 암기 능력을 기를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우연한 경험과 잘못된 믿음이 암기 능력 개발을 이렇게 늦추다니. 놀랍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하다.


나는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 얼마나 많은 오해를 하는 걸까. 순간의 잘못된 믿음으로 수많은 능력을 계발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국민교육헌장 사진 출처 : http://ssmop.org/?page_id=233&wr_id=584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