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에 35 (픽션입니다)
'우리는 차별을 찬성합니다'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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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컹. 키보다 작은 철문이 흔들렸다. 여자인 나도 마음만 먹으면 뜯어낼 수 있을 것 같은 이런 약해빠진 문 하나가 나를 보호해줄까. 하긴 보호는 무슨.. 먹고살기도 힘든 마당에.
나는 월세에 산다. 500에 35. 그 돈에는 구할 수 있는 집이 없다는 부동산 사장님을 몇 날 며칠 괴롭혀서 겨우 얻은 집, 아니 방이었다. 단독 주택 2층에 달린 철문을 열면 바로 싱크대가 놓인 공간이다. 싱크대 오른쪽에 있는 문을 열면 방이 있다. 이 막막하고 차가운 서울에 몸 하나 누일 방. 다락방이 있어서 꽤나 기대했는데 방이 아니라 창고다. 아니 창고가 아니라 지붕과 방 사이 공간을 대충 메워놓은.. 애매한 공간이다. 화장실은 주인집 마당에 있는 외부 화장실을 써야 한다. 샤워는? 싱크대 앞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서. 대체 이런 구조를 어떻게 생각해내서 만들어내고 월세를 받을까.. 자본주의적 창의성이 돋보이는 기이한 구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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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울고 말았다. 김대리는 인턴들만 보면 난리다. 우리를 졸졸 따라다니다가 실수를 발견하면 ‘옳다구나, 잘 걸렸다’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그의 업무는 ‘인턴의 실수 찾아내기’가 아닐까.. 참 속상한 게 평소엔 멀쩡하다가도 김대리만 있으면 어리바리하게 군다. 지난주에는 커피를 타다가 김대리가 부르는 소리에 놀라서 커피를 쏟았다. 아니 왜 그렇게 큰 소리로 부르냐고.
오늘은 제출한 PPT가 구리다며 타박하는 김대리 때문에 눈물을 펑펑 쏟았다. 앞에서는 분명 잘 참았는데 자리에 앉자마자 연희 씨가 괜찮냐며 말을 거는 바람에 울음이 터졌다. 밉상 김대리가 지나가면서 ‘왜 자기를 나쁜 사람 만드냐’고 궁시렁댔다. 나쁜 사람 만드는 게 아니라 나쁜 거거든요! 나도 잘하고 싶다. 근데 트집만 잡으려는 사람 앞에서는 잔뜩 주눅이 드는 걸 어떻게 해. 안 그래도 까마득하게 쌓인 업무 때문에 정신없는데.. 나쁜 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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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퇴근에 걸리는 시간은 왕복 3시간. 혼잡함이 싫어서 출근은 6시, 퇴근은 8~9시에 한다. 어차피 할 일도 많으니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는 게 속 편하다. 나를 보호해주는 건 퇴근 후 단골 술집 '어느 날'에서 마시는 술 한 잔이다. 왁자지껄한 '어느 날'에서는 모두가 활기차게 살아 숨 쉰다. 내겐 집보다 '어느 날'이 더 안전하고 포근하게 느껴진다. 집은, 그 방은 누가 몰래 들어온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아슬한 공간이다. 집엔 최대한 늦게 들어가고, 들어가면 씻고 바로 자버린다.
며칠 전부터 다락방에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처음엔 주인집에서 들리는 소리인 줄 알았다. 그런데 들으면 들을수록 콩콩, 우다다다다, 쿵쿵. 다양한 소리가 난다. 분명 다락방에서 나는 소리다. 너무 무서운데 그냥 놔둘 수는 없고. 대체 뭘까. 주말에 남동생을 불러 올려 보냈다. 귀찮아하면서 아무것도 없다고 내려오는 녀석을 다시 떠밀었다.
“야! 좀 제대로 봐봐. 나 진짜 무섭단 말이야.”
“아무것도 없어. 이런 일로 바쁜 사람 오라가라야.”
신경질을 내며 내려온 동생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나쁜 자식. 주말에도 일하는 동생이 출근 전에 들러준 건 너무 고마운데, 이렇게 제대로 보지도 않고 가버릴 거면 왜 온 건지.
나도 동생도 월급의 대부분은 시골로 보낸다. 아빠가 상철 아저씨의 말도 안 되는 꼬임에 넘어가서 그나마 있던 집을 날린 후로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돈을 벌어대고 있다. 벌어대고 있다고 할 만큼 벌고 싶지만 쥐꼬리만 한 월급을 쪼개 입에 풀칠하고, 엄마 아빠와 할머니의 풀칠을 위해 남을 돈을 보낸다. 벌써 3년째다. 벗어날 수 있을까. 매달 스치는 월급을 보며 살아서 뭐하나, 나는 왜 살고 있나, 이 삶이 끝나긴 할까.. 밑도 끝도 없는 물음표에 시달린다. 삶의 의미가, 스치는 월급으로 입에 풀칠하는 데 있다면 지긋지긋한 김대리를 신나게 패 버리고 먼지처럼 사라지는 게 낫지 않을까.. 문득 생각한다.
동생을 보내고 공원으로 카페로 탈출했다가 집에 돌아와 누웠다. 또 소리가 난다. 대체 뭐야. 무섭긴 한데.. 확인을 해봐야 할 것 같다. 혹시 사람이 숨어 사나. 500에 35도 없어서 비루한 철문을 열고 숨어 들어온 걸까. 온 집안 불을 켜고 다락문을 열었다. 우다다다다.. 실눈으로 구석구석을 좇으며 대체 뭘까 생각하고 있는데 검은 콩이 바닥에 가득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다락에 콩을 뒀었나. 저렇게 작은 콩이 있었나? 얼굴을 들이미는데 작은 녀석이 후다닥 달아난다.
... 쥐.. 쥐다.. 쥐다! 숨도 못 쉬고 나와서 문을 닫았다. 문이 붙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손을 박박 씻었다. 세수를 했다. 하고 또 했다. 이 삶이 끝나기는 할까. 월급은 무능한 부모님이, 방은 저 쥐새끼들이 차지해서 야금야금 먹어대고 있다. 차라리 쥐가 되는 게 낫지 않을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밤, 온몸이 붓도록 엉엉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