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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망 Jan 08. 2021

가시 (픽션입니다)

친구라는 이름

시은아 잘 지내?

연락이 끊어진 지 10년이 넘었는데도 자주 네가 생각나.  

특히 오늘처럼 우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면. 점심은 보통 샐러드로 때우는데 간만에 직장 동료들과 점심을 먹었어. 며칠 전 베프와 다퉈서 우울하다는 누군가의 말에, 안경을 고쳐 쓰며 정인 씨가 그러더라. 친구는 인생의 시기마다 바뀌는 존재라고. 우리가 가치를 부여하는 우정이 사실은 별 거 아니래. 삶의 형태가 바뀔 때마다 친구도 바뀌게 마련이니까 친구와의 우정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짓은 그만두라는 거야.


그녀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어. 우정에 의미를 두지 않으면 대체 어디에 의미를 둘 수 있을까. 나는 우정에도 사랑이라는 감정이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고 생각해. 너와 함께 한 3년 동안 그런 생각을 자주 했어. 우리 사회가 친구 사이의 사랑을 너무 하찮게 여기고 있는 게 아닐까.. 변화가 생기면 쉽게 끊어지는, 이어지더라도 공통 관심사가 없어지면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가벼운 관계라고 여기는 것 같아서 속상했어.


난 네가 참 좋았어. 비밀을 털어놓아도 절대 말하지 않을 것 같은 너의 진중함이 좋았어. 밝아 보이지만 깊은 우울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가끔 과하게 진지해진다는 것도. 둘 다 가난했던 시절에 만나서 그랬을까. 우리가 더욱 친해질 수 있었던 게 말이야. 둘만의 세상에서 킥킥댈 수 있었던 건 ‘가난’이라는 공통분모 때문이라는 사실을.. 지금은 확신해. 회사에서 친하게 지내던 언니들과 1년 동안 돈을 모아서 난생처음 해외여행을 갔을 때... 난 조금 아니 많이 두려웠어. 그렇게 큰돈을 나를 위해 써 본 적이 처음이었거든. 서로 말을 하진 않았지만 상황이 어려웠던 너도 비슷한 감정이지 않았을까... 생각했어. 굳건하게 마음을 먹고 ‘이 정도쯤이야’라는 태도로 경비를 냈지. 그리곤 매일 밤 집에 앉아 개인 경비를 얼마나 가져가야 할지 꼼꼼히 계산했어.


드넓은 바다와 새로운 풍경은 마치 연이 된 것처럼 하늘을 나는 기분을 선물하더라. 태어나서 처음 해 보았던 게 참 많았어. 면세점도 가보고 스노클링도 해보고.. 리조트에 머물면서 여유를 즐기기도 하고.. 그런데.. 그 여행을 생각하면 뭐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지 알아?


“제발 그만해. 피곤해”


너와 단둘이 외출해서 시장 구경을 하고 저녁을 먹었던 날. 다른 언니들은 꼭 보고 싶다던 거리를 구경하러 갔고, 그곳에 흥미가 없었던 우리끼리 시장에 갔었잖아. 시내까지 무사히 나갈 수 있을까.. 걱정하면서 시티투어 패키지를 알아보다가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 때문에 포기하고 용기를 내기로 했지. 택시를 부르려다가 호텔에서 시장까지 걸을만한 거리라는 것을 알아내고 정말 기뻤어. 호텔의 뒷 문으로 나가면 시내로 이어진다는 정보를 듣고 작은 문을 열어 발을 내딛던 그때가 생생해. 손을 꼭 붙잡고 빠른 걸음으로 시내를 향해 걸었지. 어느 순간 긴장이 풀렸는지 걸음이 느려지면서 서로를 쳐다보곤 웃음을 터트렸잖아. 너무 행복했어. 싫다는데도 억지로 길거리에서 산 빵을 먹이는 네가 얄미우면서도 좋았어. 모든 게 낯선 공간이었는데도 너와 함께 있으니까 서울 어딘가에 숨어 있는 거리를 걷는 기분이 들더라.    


맛없어 보이는 빨간 생선, 처음 만나는 푸른 채소들, 노란 망고, 처음 만난 초록 망고, 람부탄, 이름을 알 수 없는 알록달록한 과일들. 과일을 사고 싶은데 가격을 묻지 못해서 머뭇거리던 순간들. 뭐가 그리 재밌었는지 시장을 휘젓고 다니며 까르르 웃던 우리가 그리워. 가격을 알아내고 입이 떡 벌어진 네가 망고를 30개나 사서 얼마나 어이가 없던지. 적은 돈으로 망고를 30개나 살 수 있는 그곳은 천국이었지. 시장을 나와서 노을이 보일만한 식당에 들어갔어. 황홀하게 번지는 노을에 정신이 팔려서 무엇을 시켰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아. 이대로 시간이 멈추었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이었어.  호텔로 돌아가서 앉자마자 그 날 쓴 돈을 정리했어.


“그딴 거 하지 말고 우리 망고 먹자. 이거 진짜 맛있어.”

“나 망고 처음 먹어 봐. 근데 계산 좀 먼저 하고. 내일 쓸 돈도 미리 챙겨 놔야 돼.”


10분쯤 지났나.. 잔돈까지 출처를 따지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네가 ‘제발 이제 그만해. 피곤해’라며 짜증을 부렸던 그 순간이 잊히지가 않아. 문득 그 날 누렸던 행복한 순간이 실은 억지를 부려서 만들어낸 허상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어. 잔돈까지 계산해가며 살아야 하는 내가 억지를 부려서 여행에 따라나선 게 아닐까. 어쩌면 그 날 내 모습에서 너 자신을 발견해서 싫었을 수도 있겠다.. 싶네.


착하고 성실하다고 극찬했던 민호를 버리고 반질반질하게 생긴 사업가 P 씨와 결혼한다고 했을 때 놀라는 척했지만, 사실 조금도 놀랍지 않았어. 할인쿠폰의 귀재인 나와 달리 너는 늘 비싼 것을 찾아다녔으니까. 쿠폰을 뒤지는 나를 보며 “그건 가난의 흔적이고 증거야. 찌질하게 굴지 마‘라고 했던 너의 말이 아직도 가시처럼 박혀 있어.


‘언제 한번 보자’는 말로 통화를 끝낸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 내가 연락하지 않으면 우리의 인연은 끊어지겠구나. 아니 어쩌면 이미 끊어진 끈을 미련하게 붙잡고 있구나. 그 날 이후로 연락을 하지 않았고 이렇게 10년이 지났어. 왜 나는 그때 내 마음을 솔직하게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왜 연락을 끊는 쪽을 선택했을까. 하지만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한들 우리의 인연이 이어졌을까. 가시를 던진 건 너였지만 그 가시를 마음에 박아 데리고 살았던 건 나였다는 걸.. 이젠 알겠다.


얼굴 한번 보고 싶다고, 그립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편지를 쓰기 시작했는데... 한편으론 정인 씨의 말도 맞는 것 같아. 우리는 가난이라는 공통분모가 맺어준 잠깐의 친구였던 거지. 누구 하나라도 공통분모에서 탈출하게 되면 멀어질 수밖에 없는 찰나의 친구. 하지만, 우리가 찰나의 친구였음을 인정해도 함께 했던 시간이 가벼워지진 않더라. 함께 한 시간과 그 속에서 웃던 네가 그리워. 행복해하던 내가 그리워.


보고 싶지만 만나고 싶지는 않네. 웃기다. 깊숙이 찔러 놓았던 가시와 함께 너를 떠나보낼 때가 되었나 봐. 그립지만 그리운 추억으로 남겨두고 이제 너를 보내. 안녕 내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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