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골 책방지기의 추천으로 만났다. 어려워 보였지만 몇 년 전 정혜윤 작가의 책 ‘삶을 바꾸는 책 읽기’가 좋았던 기억이 떠올라 구입했다.
저자가 사랑하는 친구 여덟 명의 사생활을 통해 공동체와 연대, 희망과 사랑을 이야기한다. 여덟 명의 친구들은 자연다큐 감독 박수용, 영화감독 변영주, 만화가 윤태호, 야생 영장류학자 김산하, 청년운동가 조성주, 사회학자 엄기호, 정치경제학자 홍기빈, 천문인 마을 천문대장 정병호. 미생의 작가 윤태호 이외에는 처음 듣는 이름이다.
작가가 친구를 소개한 뒤, 친구가 직접 자신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들려주고 다시 작가가 마무리하는 구성이다. 업적이나 사회적 지위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다. 그들의 일상과 생각을 보여주기 때문에 ‘어떤 사람일까’라는 사람 자체에 대한 호기심이 생긴다. 이력이 먼저 제시되면 선입견이 만들어질 수 있는데 그것을 차단하고 그들의 삶과 이야기에 집중하게 만드는 구성이 매력적이다. 모든 이야기가 끝난 각 장의 마지막에서 짧은 약력을 만나게 된다.
부제인 ‘우리가 가진 유일한 인생은 일상이다’라는 카프카의 말이 책의 내용을 잘 보여준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틀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시선과 결로 일상을 채워가는 이들의 이야기가 다채롭게 펼쳐진다. 일상을 ‘반복’이 아닌 매 순간 새로 ‘시작’되는 것으로 여기고 사소한 일상에서 조금씩 달라질 수 있다면, 그렇게 우리 각자가 인생을 제대로 살아간다면, 그러한 우리가 모인 사회도 미래도 바뀐다는 희망을 이야기한다.
친구들의 이야기는 술술 읽혔지만 정혜윤 작가의 이야기는 생소한 철학서와 철학자들이 자주 등장해서 어렵다. 하지만 방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연주하듯 펼치는 이야기를 모두 이해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다. 지식을 자유자재로 버무려서 글로 표현해내는 것이 참 아름답다.
모두의 이야기가 좋았지만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사회학자 엄기호의 ‘말하기와 듣기에 대해서’이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너 자신에게만 머물러 있지 말고 우리 사회가 겪는 문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로 시선을 확장하라’는 취지의 글을 만날 때마다 부담스럽고 위축되었다. 아직 나에 대해 할 이야기가 많은데 아니 아직은 내 이야기밖에 할 말이 없는데 자꾸 더 큰 이야기, 나를 벗어나는 거대한 이야기를 해야 할 것만 같아서 불편했다.
저는 학생들에게 네 이야기는 지겨우니 네 이야기를 하지 말고 사회 이야기를 하라거나 네 이야기를 하지 말고 딴 이야기를 하라고 주문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네 이야기를 하되 그 안에서 동시대성을 찾아보라고 말합니다. 사회학자 엄기호 <말하기와 듣기에 대해서> p.251
머리가 깨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유일한 존재지만 시대와 사회의 영향 안에 있기 때문에 내가 겪은 문제나 겪을 문제들이 결국은 사회문제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지극히 사적인 경험이라고 생각하고 글을 썼는데 공감을 받으면 나만 겪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위로를 받는다. 이 지점에서 ‘동시대성’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어떤 글을 써야 할지,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에서 벗어나 앞으로의 방향을 명확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여덟 명의 친구들은 ‘우리의 유일한 인생인 일상’을 자신만의 결로 꽉 채워 걸어 나간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듯 보이지만 멈추지 않고 지금도 여전히 그 길 위에 서 있다. 특별한 업적을 이룬 사람들의 이야기지만 ‘완성되었다 혹은 성공했다’라기보다, 각자의 인생을 조용히 걷는 와중에 잠깐 만나 이야기를 듣는 듯하다.
‘내가 변한다고 뭐가 되겠어’에서 머물지 않고 일상을 제대로 살아간다면 개인의 삶도 타인과 사회에게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될 것이다. 거창한 무엇을 추구하기 전에 일상을 제대로 살아가는 것이 시작이다. 그들이 걸어온 길, 걸어갈 길을 생각하며 나의 길로 들어선다. 모든 것은 ‘작은 믿음에서 나온 실천’들로 시작되었다. 작은 믿음과 매일의 실천들로 나의 길이, 우리의 길이 펼쳐지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