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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망 Apr 01. 2021

'수레바퀴'를 믿지 않는다

수레바퀴 아래서 / 헤르만 헤세

‘서평으로 시작하는 글쓰기’ 모임에서 만났다. 출판사별로 번역의 차이가 있다고 해서 추천을 받아 ‘열린 책들’ (강명순 옮김)의 책으로 읽었다. 고전은 읽기 시작하면 의외로 술술 읽히는 경우가 많지만 첫 장을 넘기기가 힘들다. 특히 이 책은 빽빽한 편집 스타일 때문에 거부감이 생겨서 모임을 며칠 남겨두고 급하게 읽기 시작했다. 다행히 한스가 신학교에 들어가기 전 방학을 맞는 시기부터 몰입할 수 있었다.     

     

헤르만 헤세의 자전적인 체험을 담은 소설로, 주인공 한스가 잘못된 교육 제도와 어른들의 압박 속에서 자신을 잃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시골 마을에서 모든 이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한스는 총명하고 성실한 아이다. 어른들의 왜곡된 기대 속에서 청운의 꿈을 안고 신학교에 진학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방황하게 된다. 유일하게 마음을 나누던 친구 하일너마저 퇴학을 당하고, 어느 누구에게도 따스한 애정을 받지 못하던 한스는 결국 신학교를 나와 고향으로 돌아온다. 한스에게 열렬한 지지와 관심을 보이던 마을 사람들은 이제 그를 외면하고 비웃는다. 도피처로 자살을 준비하던 한스에게 갑작스러운 사랑이 찾아오지만 그마저도 허무하게 끝난다. 철공소의 기계공으로 새 삶을 시작하려던 한스는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강물에 빠져 죽음을 맞게 된다.     

     

한스가 가장 행복해 보였던 때는, 신학교에 합격한 뒤 여름방학에 누리는 자연과의 시간이다. 그는 자연을 사랑하고 누릴 줄 아는 섬세한 아이였다. 햇살과 바람을 즐기며 좋아하는 낚시와 산책, 수영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면서도 방학 동안 신학교에서 배울 것들을 예습하자는 목사와 교장의 권유에 자신을 위한 시간을 선뜻 공부에 내놓는다.     

     

한스는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이 자신을 위로하고 행복하게 하는지 알지 못했다. 어느 것 하나 스스로 선택하거나 결정하지 못하고 이끌려가는 그가 안타까웠다. 총명한 학생을 자신들의 기대에 부응할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어른들에게 원망스러운 마음이 일었다. 한스를 이해하는 친구가 단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친구가 되어 줄 책을 만났더라면, 스스로 깨치고 단단하게 일어설 계기가 하나라도 있었다면 한스의 삶은 달랐을까.     

     

하지만 이내 의문이 들었다. ‘나는 과연 학생들에게 어떤 어른이었을까’ 교과목을 가르치면서 정해진 기대의 틀에 맞춰 아이들을 대하진 않았는지.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 따스하게 관심을 가지고 대하기보다 개념 하나를 더 이해시키고, 한 문제라도 더 풀게 하려고 했던 내 모습이 떠올라서 씁쓸해졌다. 한편으로는 아이들을 닦달하고 성과를 내려고 안달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 속에서 탈출한 지금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뭔가 문제가 있는 건 확실한 데 말이야. 아무튼 앞으로 더 열심히 하겠다고 약속해 줄 텐가? ~ 그런데 제발 지치지는 말게. 안 그러면 수레바퀴 아래 깔리게 될 테니까 (p.133)

     

신학교의 교장은 한스에게 더 열심히 달리라고, 하지만 지친다면 수레바퀴에 깔릴 수 있으니 조심하라고 말한다. 토론 과정에서 각자가 생각하는 ‘수레바퀴’의 정의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읽는 사람마다 자신의 수레바퀴는 무엇인지, 수레바퀴에 깔리지 않기 위해 뛰고 있는지, 벗어나고 싶은지, 수레바퀴를 직접 끌고 가고 있는지, 스스로 만든 수레바퀴는 없는지 등등 각자의 시선에 맞게 다양한 생각을 할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내가 해석한 수레바퀴는 ‘사회적 고정관념’이다. 인생의 시기마다 정해진 길이 있다는 믿음 - 학교에 들어가 공부하고 직장을 구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노후를 준비하고.. - 또는 모두가 선망하는 직업이 우수하다는 통념, 공부를 잘해야 한다는 신념 등.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다른 사람들과 비슷한 속도로 시기마다 주어진 미션을 클리어하며 살고 싶었다. 쳇바퀴 돌 듯 바쁘게 일에 매진하며 돈을 모으고 정해진 미래를 준비했다. 결혼을 위해, 아이를 낳고 기르기 위해, 노후를 위해 생각할 겨를 없이 열심히 일하는 것이 옳다고 믿었다.     

     

난임으로 인해 의도치 않게 휴직을 하게 되었다. 정해진 길에서 혼자만 떨어져 나온 것 같아 불안했다. 바쁘게 구르고 있는 수레바퀴 안에서 나의 자리를 찾아 열심히 달려가고 있다고 믿었는데 탈락한 것이다. 탈락이라고 믿었다. 스스로 패배자가 되어 그동안 달려온 길과 나의 삶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놀랍게도, 알게 되었다. 탈락한 것이 아니라, 패배한 것이 아니라 이제야 내 길로 들어섰음을. 나의 의지는 아니었지만 운 좋게도 새로운 길 위에 발을 들여놓았음을.     

     

그 과정에서 책과 모임이 나를 깨웠다. 책을 통해 사람 수만큼이나 삶의 다양한 길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각자의 길을 걷고 있는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용기를 얻었다. 다양한 시선으로 삶을 바라보며 한 걸음 한 걸음 내 길을 만들어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인생에 정해진 길이란 없다. 꼭 해야 할 일, 꼭 지켜야 할 과정도 없다. 이제는, 수레바퀴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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