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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발표를?’
연희의 가슴이 쿵쾅거렸다. 그녀는 사람들 앞에 나서본 적이 없다. 늘 있는 듯 없는 듯 평범한 존재가 되고 싶었다. 그녀는 자신이 평균이라고 생각했다. 평범한 얼굴에 무난한 성격, 중간 키에 뭐든지 중간쯤 되는 능력. 단, 달리기를 못 한다. 평범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것은 남들에게 절대 보여줄 수 없다. 고2 때 ‘달리기’로 민지와 크게 다퉜다. 장난꾸러기 민지가 달리기 반대표로 연희를 추천했을 때 연희는 길길이 날뛰었다. 평범하지 않음을 들키는 것보다 신경질을 부리는 게 나았다.
연희가 발표를 하게 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정교수의 법경제학은 필기시험이 전부였는데 이번 학기에는 조별 과제가 생겼다. 기업 담합에 관한 판례 중 한 가지를 선택하고 입장을 정리해서 발표하는 것이다. 사회복지를 전공하는 연희는 기업 담합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경제학과인 남자 친구 민준이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정교수의 강의를 극찬했고, 특히나 법경제학이 재밌다는 이야기에 혹했을 뿐이다. 아는 게 있어야 자료를 찾거나 의견을 정리할 텐데.. 몰라서 튀는 것보다는 발표를 하겠다고 나서는 것이 연희에게는 자연스러웠다. 발표는 조원들이 정리해 준 대로 읽기만 하면 될 테니까.
“그게 무슨 문제라고~ 그냥 해. 너 말 잘하잖아.”
민준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모든 일에 완벽을 기하는 연희는 속이 타들어가는데 천하태평의 대명사 민준에게는 늘 모든 일이 신나는 모험이다.
“나 발표해 본 적 없어. 남들 앞에 서 본 적도 없단 말이야!! 필기시험이 전부라더니 이게 뭐야. 대체 왜 법경제학을 추천한 거야?!!?!!”
“앗, 나 늦었다. 저녁 먹으면서 이야기하자!!”
갑자기 달려가는 민준을 바라보는 연희에게서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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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별 모임은 그럭저럭 진행되었다. ‘담합’이라는 단어를 처음 만났을 때는 어렵기만 했는데 과제를 하다 보니 뉴스에서 종종 듣던 이야기였다. 하지만 연희에게는 ‘의견’이 없었다. 적당히 중간쯤에 서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타인을 돕는, 튀지 않는 존재가 되고 싶은 그녀에게 ‘기업 담합’은 관심 밖의 일이었다. 발표를 하는 자신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어질어질해졌다.
어떻게든 내용을 이해하고 자신의 언어로 소화해야 발표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모든 과제 모임에 참석했다. 모르는 것은 조원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메모했다가 책을 뒤지거나 검색해서 해결했다. 정 안 되는 건 민준에게 도움을 청했다.
연희는 지겹도록 연습했다. 대본을 외우고 고치고 시간을 재며 발표를 점검했다. 수업 시간에 버벅거리는 자신을 상상하던 연희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중간만 하면 돼.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마. 남들처럼 평범하게. 후~~’
듬성듬성 앉아 있는 학생들 사이로 민준이 앉았다. 뭐든 꼼꼼하게 준비하는 연희는 분명 잘 해낼 거라고 믿는 민준의 얼굴에는 장난기마저 서려 있었다. 씨~익 웃는 민준의 얼굴을 외면하며 연희는 발표를 위해 앞으로 나갔다.
‘무난했어.’라는 연희 자신의 평가와 달리 정교수와 조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꼿꼿한 자세, 분명한 발성, 시선 등 모든 것이 명쾌했다. 민준의 입에서 발표 천재라는 말까지 듣게 된 연희의 마음에 뿌듯함과 함께 묘한 우월감이 피어났다. 늘 무리에 섞여 평범해지려고 노력했던 그녀에게는 낯선 감정이었다. 다른 발표자들보다 잘했다는 생각은 어디서든 ‘중간’에 서 있던 연희를 앞 줄로 밀었다. 동시에 다시 ‘중간’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강한 욕구를 느끼게 했다. 연희에게 삶의 지침이었던 ‘평범’이라는 단어가 괴이하게 느껴졌다.
‘중간만 하면 된다. 남들처럼 평범하게 사는 게 가장 편안한 삶이야.’
온화하지만 단호한 연희의 아빠가 늘 주문처럼 했던 말이다. 연희는 아빠에게 칭찬을 받은 기억이 없다. 다정한 사람이었지만 ‘튀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연희가 학교에서 상장을 받아 가면 “이런 거 받아서 뭐해. 그저 사람은 평범하게 사는 게 최고야”라는 말로 기대에 부푼 연희의 마음을 쪼그라들게 했다. 대학생이 되어 서울로 올 때도 연희가 아빠에게 들은 당부는 “튀지 말고 중간만 해. 딱 중간만”이었다.
다수에게 잘했다는 칭찬을 받고 스스로도 잘했다는 느낌은, 태어나서 처음 만나는 묘한 감정이었다. 뒤에 따라온 뿌듯함은 더더욱 낯설었다. 민준에게서 ‘발표 천재’라는 말을 들은 순간, 그 자리에서 제일은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생각에 깜짝 놀랐다. 내가 ‘제일’이라니. ‘중간’이 최고가 아니었던가. 어째서 남들보다 잘했는데 뿌듯한 감정이 드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는 연희에게 최선의 종착점은 ‘중간’이었다. 더 나아갈 수 있는 순간에도 평범과 중간에 집착하느라 그 자리에 머무는 데 온 에너지를 쏟았다.
***
연희에게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매일 학교에 가고 과제를 하고 민준을 만났다. 하지만 모든 것이 달라졌다. ‘중간’과 ‘평범’이 낯설어졌다.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모든 것들이 새롭게 다가왔다.
“다음 과제 발표도 내가 해볼까?”
‘중간’을 위한 세계가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