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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은진 씨도 흰머리 있네요!!”
호들갑을 떨며 큰소리로 외치는 정민 씨의 입을 막아버리고 싶다.
“하하하.. 거기에도 있어요? 작년부터 생기기 시작하더니 자꾸 늘어나네요.”
“어머, 웬일이야. 흰머리는 우리 엄마 아빠한테만 있는 줄 알았더니~~~ 얼른 염색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 하하하하.;;;”
마침 엄마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느라 그녀의 호들갑에서 벗어났다.
“병원에는 다녀왔어? 왜 통 소식이 없니?”
벗어났다 싶었더니 더 큰 그물에 걸렸다.
“네.. 엄마. 다녀왔어요. 과배란 주사 맞는 중이에요.”
모두의 관심이 귀찮다. 흰머리가 나든 병원에 가든 다들 관심 좀 꺼주면 좋겠다. 그런데 흰머리라니? 전화를 끊고 후다닥 화장실로 뛰어들어가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작년까지는 분명 귀 위쪽으로만 한두 가닥뿐이었는데.. 몇 개월 전부터 한자리에 열 가닥 이상의 흰머리들이 풍성하게 자라기 시작했다. 그때도 일부러 머리를 들춰 샅샅이 뒤져야 녀석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남들에게도 쉽게 들킬 만큼 많아졌다니.. 받아들일 수가 없다.
처음 흰머리를 발견했을 때는 별스럽지 않았다. 스트레스 때문에 한두 가닥 정도는 종종 만났으니까. 하지만 당당히 넓은 영역을 차지하며 자라고 있는 무리들을 발견했을 땐, 털썩 주저앉고 싶었다. 미용 때문이 아니다. 늙어 ‘보여서’가 아니다. 이제 영영 아이를 낳지 못하는 늙은 몸이 된 것 같아서 덜컥 겁이 났다. 나에게 흰머리는 그냥 흰머리가 아니다. 안 그래도 마흔이 넘은 노산이라 임신 가능성이 점점 희박해지고 있는데 흰머리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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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창한 날이다. 언덕 위에 물기를 가득 머금은 나무가 늠름하게 서 있다. 부드러운 산들바람에 연둣빛 잎사귀들이 반짝반짝 빛난다. 햇살이 따사로워 눈이 부시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거대한 강줄기가 굽이굽이 흐르고 있다.
갑자기 목이 마르다. 있는 힘껏 뿌리를 뻗어 물을 마시고 싶지만 숨이 차다. 반짝반짝 빛나던 잎사귀들이 늘어지기 시작한다. 벌써 갈색빛을 띠는 녀석이 생겼다. 안돼! 아직은 안돼! 가지가 마른다. 따갑던 햇살은 저 멀리 산 뒤로 사라지고 메마른 공기가 휘몰아친다. 뿌리를 뻗으려 할수록 물기가 사라지고 말라간다. 마르고 말라 타버릴 것 같다. 삐쩍 마른 내가 보인다. 아직은 안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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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이 오지 않는다. 검색창에 ‘노산 흰머리’를 쳐 보았다.
‘노산의 설움 – 흰머리, 노산 흰머리 커버 두건?, 임신하고 흰머리 생기나요?’
꼼꼼히 읽어보니 아이를 가진 뒤 흰머리가 많아진 사연이 많았다. 흰머리가 난다고 해서 임신 불가의 몸이 되는 건 아니구나. 노산인데 흰머리가 많아져서 속상하다는 글에 피식 웃음이 났다. 배부른 소리 하고 있네. 흰머리든 대머리든 임신을 했구먼.
‘노산 흰머리’ 글을 몇 개 읽고 나니 한결 마음이 편하다. 냉장고 문을 열고 시원한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흰머리 그게 뭐 대수라고. 아직 괜찮다. 물 많이 마시고 운동 잘하자. 흰머리도 정민 씨의 말도 엄마의 말도 신경 쓰지 말고.
아직은 괜찮다. 괜찮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