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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망 Jun 05. 2021

왜곡된 신념과 아버지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 엄기호

미작(글쓰기 모임) 지정 책으로 만났다. 《사생활의 천재들》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이 사회학자 엄기호의 <말하기와 듣기에 대해서>였기 때문에, 엄기호 작가의 책이라는 사실을 알고 매우 기대했다. 기대한 만큼, 기대 이상으로 특별한 책이 되었다. 아버지에 대한 시선을 획기적으로 바꾸게 되었기 때문이다.


3부로 구성된 이 책은 고통을 겪는 사람들과 그 곁의 풍경을 통해 '고통의 언어학, 사회학, 윤리학'에 대해 이야기한다. 1부에서는 고통을 겪는 이들과 그 곁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2부에서는 고통의 사회학적 측면을, 3부에서는 사회에서 고통을 어떻게 다뤄내야 할지를 짚어본다.      


어렵게 느껴지는 주제였지만 고통에 놓인 이들의 다양한 사례를 통해, 사람들이 고통을 견디기 위해 어떤 선택을 하는지 보여줘서 술술 읽혔다. 고통 속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 곁에 있는 사람들이 겪게 되는 또 다른 고통에까지 시선을 확장시켜 보여준다.       


1부 고통의 언어학을 읽으면서 IMF 외환위기 때 시작된 우리 가족의 지난한  시간이 떠올랐다.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빚을 갚으며 보내야 했던 20대 그 시절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고통을 견디며 버티는 시간이었다.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그 시간을 '오로지 스스로의 의지로 참고 견뎠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계기는 다음 문장이다.      


사실 고통을 겪는 사람들의 첫 번째 반응은 '억울함'이다. 힘들고 지치고 괴로운 일이 닥쳤을 때 '왜 하필 내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것이다.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p.33     


나는 억울하지 않았다. 대체 왜 억울하지 않았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고 얻은 결론에 큰 충격을 받았다. 억울함이나 '왜 하필 내가?'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지옥 같은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동력은 '아버지를 향한 증오심'이었다. 나에게는 원망의 대상이 분명했던 것이다.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을 동력으로 그 시간을 버텼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니, 그동안의 시간과 사건들이 재구성되기 시작했다. 코끼리 다리를 만지면서 그것이 코끼리의 전부인 줄 알았다가, 번쩍 눈이 뜨여 코끼리의 전체 모습을 구석구석을 보는 느낌이랄까. 살면서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새로운 시선으로 과거를 되짚어보았다.      


사실 아버지는 가족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하셨을 것이다.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운이 너무 안 좋았을 뿐이다. 아버지의 잘못된 선택으로 경제적인 빈곤을 겪어야 했지만 그건 아버지의 의도가 아니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나는 여전히 거리를 두고 아버지를 밀어냈다. 지금까지도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미움을 가지고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새로운 시선으로 과거를 돌아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으로 그 시절을 버텼는데, 그렇다면 아버지는 그 시간을 어떻게 통과했을까. 자신을 믿지 않고 외면하는 나와 가족들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시골에서 홀로 지내며 그 오랜 시간을, 그 깊은 고통을 어떤 마음으로 버텼을까.'      


온 힘을 다해 아버지를 증오하는 나에게 아버지는 늘 같은 모습으로 손을 내밀고 있었다는 것을, 사실 나는 알고 있다.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마음속에는 개운치 않은 찌꺼기가 남아 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아버지를 서먹하게 대하면서 그 이유를 몰랐다. 마음속 찌꺼기들을 치울 생각도 하지 않고 습관처럼 아버지를 미워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책을 계기로 아버지에 대한 불편한 마음의 근원을 알게 되었다. 무기력한 고통 속에서 나를 지탱해 주었던 증오심을, 나는 단단히 믿고 있었던 것이다. 나를 고통에서 꺼내 준 증오심이 틀릴 리 없다는 무의식의 외침에, 아버지 대신 여전히 증오심을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닐까.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시간들을 지금까지와는 다른 시각으로 재구성하게 한 굉장한 책이다. 어떤 책을 읽어도, 어떤 이야기를 들어도 바뀌지 않았던 아버지에 대한 시선을 한 번에 바꾸어 주었다. 이젠 아버지를 봐도 미움이 올라오지 않을 것 같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던 미움의 뿌리를 직면하고 나니 이미 썩어 없어져 버린 왜곡된 믿음이라는 걸 알겠다.      


고통 속에 있는, 고통을 겪고 있는 이의 곁에 있는 사람들이 꼬옥 읽어보면 좋겠다. 나처럼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될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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