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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망 May 28. 2021

아이들의 소원

경험에 허구를 더해 쓴 글입니다.

“야!! 너 일로 와 봐!!"


째지는 외침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해를 등지고 서서 빙글빙글 웃는 ‘대장’의 얼굴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자기 키만 한 나뭇가지로 나를 가리키며 다시 소리쳤다.


“야!! 너 말이야. 귀가 먹었냐?


간신히 정글짐에 올라앉아 막 쉬려던 참인데... 작게 한숨을 쉬며 내려갔다.


‘대장’의 이름은 주영이다. 스스로 대장이라는 별명을 지어 아이들에게 강요하는 그 아이는 학교 여자아이들 중에 키가 제일 크다. 주영이 옆에 찰싹 붙어서 큰 소리로 웃고 떠드는 민진과 영지는 나보다 작다. 민진이는 항상 머리를 치켜올려 묶었다. 안 그래도 날카로운 눈이 머리카락을 따라 하늘로 향했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식칼이 떠오른다.


세 아이들 뒤로 붉은 노을이 가득했다. 주영의 그림자 끝에서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야 이것 봐봐. 여기 동그라미가 세 개 있지? 넌 이것 중에 어떤 걸 담탱이 선물로 줄 거냐?”


운동장 바닥에 크기가 다른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선물? 선물이라니.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곧 스승의 날이다. 스승의 날 선물 이야기구나.


올해 우리 학교에 온 담임 선생님은 한눈에도 착해 보였다. 큰 눈망울과 긴 머리카락을 가진 그녀가 단박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슬프게도 그녀는 주영이를 중심으로 한 아이들의 괴롭힘에 시달렸다. 나의 6학년 생활도 슬프기는 매한가지였다.


학교에는 윗마을과 아랫마을 아이들로, 학생들이 은근히 분리되어 있었다. 윗마을은 산 중턱에 자리 잡은 **회사의 사택을, 아랫마을은 학교 근처에 자리 잡은 농업 마을을 칭하는 말이었다. 윗마을에 사는 나는 6학년 반 배정을 보고 뜨악했다. 친한 친구가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반 구성원 대부분이 아랫마을 아이들이었다. 걱정도 되었지만 곧 마음 맞는 친구를 사귈 수 있을 거라는 기대도 가지고 있었다.


주영이의 대장 놀이는 나의 소심한 기대를 무너뜨렸다. 주영이는 자신에게 온전히 잡히지 않는 나를 못마땅해하는 것 같았다. 어른만 한 키에 거친 말을 하는 주영이가 무서웠지만 그 아이에게 잡힐 생각은 없었다. 놀아나고 싶지 않았다. 쥐 죽은 듯 조용히 지내면서, 빨리 시간이 흘러 졸업할 수 있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할 뿐이었다.


서로에 대한 탐색이 끝나면서 작은 괴롭힘이 시작되었다. 나만이 느낄 수 있게 은근히 놀리는 분위기는 견딜만했다. 무리 지어 거칠게 구는 아이들이 무서웠지만 속으로는 ‘어차피 나도 너희와 친해질 생각이 없어’라는 꼿꼿한 마음이었다.


그림자처럼 지내겠다는 다짐이 흔들리게 된 건 담임 선생님을 좋아하게 되면서부터다. 주영이를 비롯한 몇몇 아이들이 반 분위기를 만들었다. 선생님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키득거리거나 선생님이 무언가를 제안하면 싫다고 아우성쳤다. 매시간 시달리는 선생님의 모습이, 조용히 있던 나를 변하게 했다. 선생님의 말이 침묵에 흩날리지 않도록 작지만 분명히 소리 내어 대답했고, 그녀의 제안에 호응했다.


그런 태도들이 주영이의 심기를 쿡쿡 건드렸을 테지.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 크고 작은 동그라미를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이거.” 내가 가리킨 것은 중간에 그려져 있던 삐뚤빼뚤한 동그라미였다. 대장은 뭐가 그리 우스운지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고, 곁에 있던 아이들도 춤을 추듯 따라 웃었다. 나는 대체 동그라미에 어떤 의미를 부여한 걸까. 왜 주영이의 말을 고분고분 듣고 셋 중에 하나를 골라 대답했을까. 별안간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유치한 장난질에 걸려들었다는 패배감으로 부아가 치밀었다. 선생님을 볼 때마다 미안한 마음에 더욱 열심히 대답하고 더욱 열심히 웃었다.


그날도 무리 지어 선생님을 놀리는 아이들과 신경전을 벌이며 선생님 편을 들었다. 피곤한 마음으로 집에 가다가 도시락 가방으로 놓고 왔다는 걸 깨닫고 학교로 발걸음을 돌렸다. 교실에 가까워질수록 활기찬 목소리와 웃음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지은 죄도 없는데 살금살금 문으로 다가가 교실 안을 훔쳐보았다.


낯선 주영이가 선생님을 바라보며 상냥하게 웃고 있었다. 나의 적과 친애하는 선생님이 살갑게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는 순간, 이상하게 안도감이 스쳤다. 어쩌면, 졸업 때까지의 학교생활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온몸을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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