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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망 Jul 17. 2021

때로는 희망을 품게 되는 게

다시 시작이다

그게 가장 견디기 어려워. 때로는 희망을 품게 되는 게 말이야. 특히 밤에는 더 그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 p.124

시험관 4차가 시작되었다. 아직 병원을 가기 전이지만 진료 예약을 했으니 시작이다. 이 시기, 다음 시험관을 시작해야 할 것 같은 때가 오면 도망치고 싶어진다. 내 삶으로부터, 해야 할 과정으로부터, 모든 것으로부터.

몇 번은 어딘가로 훌쩍 떠나서 할 일없이 돌아다니곤 했다. 여행을 다녀와도 달라지는 건 없지만, 그렇게라도 스스로를 달래서 마음이 단단해진 상태로 진료를 시작하고 싶었다. 신나서 여행 계획을 짤 때는, 여행을 가고 싶어서 시험관을 핑계 삼는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희망을 품게 되는 것이 가장 견디기 어렵다. 기대했다가 실망하고 또 기대하고 실망하고. 그 반복이 가장 힘들다. 사소한 변화에 작은 기대를 걸었다가 실패라는 것을 알게 되면, 믿을 수없이 빠른 속도로 멘탈이 부서진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에서 읽은 내용이 가끔 생각난다. 수용소에서 성탄절부터 새해까지 일주일간의 사망률이 급격히 증가했는데, 이는 가혹한 노동조건, 식량 사정의 악화, 기후 변화, 새로운 전염병 때문이 아니었단다. '성탄절에는 집에 갈 수 있으리라라고 막연히 기대하던 희망이 상실'되었기 때문이었다. 수용소와 비교하는 건 너무 과하지만 '희망의 상실'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시험관 초기에는 안 그러려고 해도 자꾸 희망이 생겼다. 희망을 가졌다. '이번엔 될 거야. 왠지 느낌이 좋아.'

그랬다가 금세 '아니야. 안 될지도 몰라. 괜한 기대 갖지 말자.' 하루에도 수만 번 오락가락하는 마음을 붙들어야 했다. 지금은 음.. 아니라고 믿고 싶지만 여전히 반복되는 '희망과 절망 사이를 오가는 이 시간'이 힘겹다. 무덤덤하게 임하면 참 좋을 텐데 그게 너무 어렵다. 게다가 희망 없이 진료를 받는 건 모순이다. 가능하다고 믿으니 노력하는 건데..

내가 어쩔 수 없는 상황, 노력과 상관없이 운명처럼 정해지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무기력해진다. 확률이 극도로 낮은 로또를 맞추며 기대하는 느낌. 그때 가장 도움이 되는 건 매일 내가 하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다. 일상에서 행해지는 모든 것 - 밥하기, 설거지, 책 읽기, 글쓰기, 모임 등. 근데 그게 또 어렵다. 그래서 도망치고 싶다. 집중하지 않고 다 내던져버리는, 잠깐의 일탈 같은.

이번엔 여행을 가지 못했다. 코로나 때문에 꼼짝없이 붙잡혀서 집에 있는 시간이 늘었다. 그래서 모든 일로부터 도망쳤다. 밥을 하지 않고, 청소도 일도 안 하고, 글도 안 쓰고, 모임에도 불참했다. 일상으로부터 벗어났다. 하지만, 나는 과연 벗어났던 적이 있던가. 결국 나는 내일 병원에 갈 테지. 언제 깨질지 모르는 쿠크다스 멘탈을 붙잡고 이 과정이 끝나기를, 좋은 소식이 오기를 또 기대하겠지.

다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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