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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훈 Nov 22. 2022

슬픔의 위로

엘가 첼로 협주곡

영국은 17세기 헨리 퍼셀 (Henry Purcell, 1659~1695) 이후 근 200여 년간 내세울만한 자국 출신 작곡가가 등장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등장한 에드워드 엘가 (Edward Elgar, 1857~1934)는 음악에 대한 영국인들의 자존심을 다시 세워 주웠고 이후 본 윌리엄스, 벤저민 브리튼 등의 작곡가들이 대를 이으며 20세기 영국 고전음악의 중흥기를 선도하게 됩니다. 엘가는 성당 오르간 연주자이자 조율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독학으로 음악을 공부하였지만 40세 이전까지는 무명의 작곡가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수수께끼 변주곡', '위풍당당 행진곡'등이 크게 성공하면서 영국 최고의 작곡가로 거듭나게 됩니다. 엘가의 '대기만성'에 대한 흥미로운 일화가 있는데 엘가는 무명시절 편지봉투에 주소 없이 이름만 적어도 우편물을 받을 수 있게 하겠다고 결심했는데 성공을 거둔 후 정말로 수신인에 엘가의 이름만 적어도 우편물이 도착했다고 합니다.


엘가의 친필 서명


엘가의 첼로 협주곡은 드보르작, 랄로의 협주곡과 더불어 낭만주의 첼로 협주곡의 걸작으로 꼽히는 명작입니다. 엘가는 1919년 그의 나의 61세에 이 곡을 쓰기 시작했는데 편도선 절제 수술을 받고 별장에서 요양 중인 기간이었습니다. 사실 엘가는 이미 1900년에 첼리스트인 카를 푸티에게 첼로 협주곡 작곡 의뢰를 받았는데 무슨 이유인지 차일피일 미루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첼로 협주곡은 1919년 10월 27일, 엘가 본인의 지휘로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펠릭스 살몬드의 협연으로 초연되었는데 처참한 실패로 끝나고 맙니다. 대실패의 원인은 오케스트라 리허설의 부족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대중이 바라던 엘가의 음악이 아닌 것이 더 큰 요인이었습니다.


대중들이 사랑한 이전까지의 엘가의 작품들은 낭만적인 아름다움이 넘치고 밝고 온화했는데 그의 첼로 협주곡은 어둡고 우울하고, 처절하기까지 한 음악이었기 때문입니다. 곡의 이런 분위기는 1차 세계대전이었던 당시 상황에 대한 불안하고 처절한 느낌과 건강악화로 대수술을 경험했던 엘가의 심정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엘가의 첼로 협주곡에는 전쟁으로 고통받는 영국 국민들을 위로하겠다는 마음도 반영되어 있습니다.


엘가 첼로 협주곡 최초 레코딩 (1920) 엘가 지휘, 베아트리체 해리슨 첼로 


엘가의 첼로 협주곡은 3악장 형식을 취하는 보통 협주곡과 달리 4악장의 구성을 가지고 있으며 1,2악장과 3,4악장은 끊이지 않고 연주가 됩니다. 그리고 일종의 순환 형식을 취하며 주요 주제들이 각 악장에 등장하며 곡의 통일성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곡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주제는 곡의 시작부에 등장하는 첼로의 독주인데 이 주제는 엘가가 수술 후 의식을 되찾은 후 번뜩 떠오른 악상을 부인에게 급히 종이와 펜을 가져달라고 해서 적은 것이라고 합니다.


엘가 첼로 협주곡

런던필하모닉 다니엘 바렌보임 지휘 / 쟈클린 뒤 프레 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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