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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훈 Aug 30. 2022

운명에 대한 완전한 복종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제5번

"운명, 그 알 수 없는 신의 섭리에 대한 완전한 복종"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제5번은 그가 48세 때인 1888년에 작곡되었습니다. 제4번 교향곡 발표 이후 무려 11년 만의 일이지요. 차이코프스키는 1887년부터 서유럽의 연주여행을 다니면서 새 교향곡의 소재를 수집하고 있었습니다. 교향곡 제5번의 초연은 1888년 11월 17일 상트 페테르부르크 음악협회 연주회에서 차이코프스키의 지휘로 이루어졌는데 반응은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차이코프스키가 지휘자로서 능숙하지 못한 탓도 있었지만 비평가들은 곡을 이해할 수 없다며 혹평을 쏟아내었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차이코프스키 본인도 교향곡 제5번에 대하여 자신감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의 후견인이었던 폰 메크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 곡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 속에는 무엇인가 싫은 것이 내재되어있고, 과장되어 꾸며진 색채와 불성실하게 억지로 만들어진 것들이 있습니다. 이것들이 사람들에게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비평가들보다 더 냉혹하게 자신의 작품을 혹평한 차이코프스키는 이듬해인 1889년 독일 함부르크의 연주회에서 연주자들과 비평가들의 호평을 받은 후 이 곡에 대한 자신감을 회복하게 됩니다.


46세 때의 차이코프스키 (1887)


교향곡 제5번은 격정적인 4번과 비극적인 6번 사이에 끼어져 있어서 특색이 없다는 평을 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두운 색채의 아름다움과 섬세한 서정성은 교향곡 제5번을 그의 교향곡들뿐만 아니라 모든 교향곡들 중에서 가장 널리 연주되는 곡으로 만들었습니다.


교향곡 5번은 전통적인 4악장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통상적으로 스케르초로 쓰이는 3악장을 왈츠의 형식으로 작곡한 것이 돋보입니다. 그리고 교향곡 제4번과 같이 운명의 동기 등장하는데 1,4악장에만 등장했던 교향곡 제4번과 달리 교향곡 제5번의 '운명의 동기'는 전 악장에 변형되어 나타나 순환구조를 이루며  전체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특히 클라리넷이 쓸쓸히 '운명의 동기'를 연주하는 1악장 도입부에 차이코프스키는 "운명, 그 알 수 없는 신의 섭리에 대한 완전한 복종"이라고 적어 놓았고 '운명의 동기'에 대해서도 "신의 섭리"라고 그의 수첩에 적어 놓았습니다. 


1악장 도입부의 '운명의 동기' 자필보


교향곡 제5번은 비극에서 출발하여 화려하고 찬란한 승리의 행진곡으로 마무리하는, 전형적인 독일 교향악의 모토 ‘암흑에서 광명으로’의 정신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차이코프스키의 빛으로 가는 여정은 (그의 메모에서 알 수 있듯이) 베토벤과 브람스가 보여준 투쟁과 극복이 아닌 거역할 수 없는 '신의 섭리'에 대한 순종의 모습입니다. 제4악장의 화려하고 거창한 승리가 과장되어 보이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일생을 통하여 차이코프스키를 따라다니던 염세적이고 비관적인 우울감은 결국 완전히 해방되지 못하였고 이런 어두운 성향은 곡 전체의 근간을 이루며 예술적 아름다움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제5번

베를린 필하모닉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지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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