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 빠진 날
누구나 다 반짝일 운명을 타고 났다.
아기를 낳고 얼마 있으니 날이 훤히 샜다고 한다.
오늘은 나의 귀 빠진 날이다.
(아기가 엄마 뱃속에서 나올 때 머리가 나오는 순간이 가장 힘들고 그중에서
귀가 빠지면 이 후로 순조로워 생일을 귀빠진 날이라고 한다고 한다.)
샛별이 반짝일 때 태어났다.
정확한 시간은 모르시고 날이 저물도록 산통이 있다가 새벽녘에 태어났다고 한다.
오늘 새로 안 사실은
"그때 신기(신의 기운) 있었던 할머니께서 네 엄마 배를 문질러주셔서 잘 낳은 것 같아"
하며 엄마 얼굴을 쳐다보시니 엄마도 " 맞아. 그려" 하신다.
내가 부모님을 40년 넘게 만나지만 가끔 새로운 사실을 얘기할 때는 깜짝 놀라기도 한다.
혹여 나중에 출생의 비밀 같은 것도 알려주실 수 있으니 미리 각오해야겠다.
나는 병원이 아닌 집에서 태어났다.
우리 세 자매는 모두 집에서 태어났다.
나와 언니는 시골집. 초가집.
장작을 패서 아랫목에 군불을 때야 하는 곳.
집 앞에 기차가 지나다니고 작은 개울이 있던 곳이었다.
동생은 이사 가서 스레트 집 일명 석면 집이었다.
부엌에 연탄아궁이가 있었고 연탄을 때었던 곳.
작은 마을이었고 마을 사람의 대다수를 알고 지냈고
누구 집에 아기가 태어난 것은 마을의 경사였던 곳이다.
6살 터울의 동생이 태어 난 날이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동생이 태어날 때는 하나밖에 없는 방 아랫목에서
낳은 걸로 기억한다. 그때 사촌 언니까지 우리는 세명은 모두 윗목에서 자고 있었다.
5월인데도 집안의 훈짐이 가득했고 비가 와서 스레트 집 지붕을 때려 꽤 시끄러웠다.
누워있는 방 언저리 너머 어른들 몇몇 분들이 다급하게 왔다 갔다 뭔가 분주함이 느껴졌는데
그 이후에는 나도 스르르 잠이 들어 기억을 하지 못하지만
다음날 작은 아기가 있었다.
나의 엄마품에 다른 아이가.
너무 낯설어 한동안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그때 이후로 나는 막내가 아닌 둘째가 돼 있었다.
일명 2호. 한동안 1호와 3호만 엄마가 사랑하는 것 아니냐는 어깃장을 놓은 적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6살까지 막내로 귀염을 받다가 내 자리를 빼앗긴 분노가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있었나 보다.
사춘기 때의 어깃장은 지금도 가끔 회자되어 나를 속수무책으로 만들게 하신다.
우리 집은 딸만 셋이다.
큰 아들이 병으로 어린 나이에 죽고 엄마는 내리 딸만 낳았다.
아빠는 힘드실 때 가끔 우리와 엄마를 포함하여 한꺼번에 육두문자를 날리셨다.
정신 모차 릴 정도로 너무 많이 맞는 날이면 우리는 엄마와 똘똘 뭉친다.
일명 ' 뭉쳐야 산다. 흩어지면 죽는다'는 각오로 우리끼리 엄마랑 아빠 뒷담을 한다.
그러면 엄마는 여지없이 "그래도 네 아빠다. 아빠도 힘들어서 그래"라고.
그때는 미웠고, 엄마가 한없이 무능력해 보였다.
세 자매는 한 목소리로 "차라리 헤어져"
"그러지 마. 그래도 아빠가 돈 벌으니깐 니들이 학교도 갈 수 있어"
다행이다. 엄마가 아빠의 손을 놓지 않아서.
다행이다. 엄마가 그래도 우리 잘 크라고 아빠라는 존재를 부인해주지 않아서.
엄마는 자신보다 우리가 먼저였으니까.
아빠에게 미운 마음, 서운한 마음이 많이 사라졌다.
왜냐하면 아빠는 나보다 더 몇 배로 힘든 세월을 지냈다는 것을 알았고
비로소 이해하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 아빠는 연약하고 마음이 한없이 아픈 사람이었다.
열 달 동안 나를 밀어내지 않아서
내가 아기였을 때 나를 버리지 않고 한없이 부드러운 젖과 안식처를 주었으며
나를 위해 수많은 세월을 참고 인내해주셨던 날들이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기억은 오류가 너무 많다.
또한 부모에게 받은 것이 훨씬 많음에도 불구하고 받지 않은 것을 더 기억하기 쉽다.
내 판단과 기억의 오류로 지금 잘못하고 있다면
아니 부모의 잘잘못을 떠나서
부모의 좋고 싫음을 떠나서 부모를 더 이상 볼 수 없을 때,
나는 한없이 통곡할 수 밖에는 없고 더 이상 기회가 없을 수 있다.
그렇다면 부모와 화해를 하는 일은 분명 나를 위한 일이다.
이제는 더 이상 부모를 따지지 않을 것이다.
이제는 사랑하기에도 너무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에.
태어나서 좋다.
그 누가 축하해주지 않아도 조용히 나는 나 자신에게 말을 걸었다.
"잘 태어났어. 별일. 큰일 안 하면 어때. 즐겁고 재미나게 살자,
때론 힘들면 힘든 대로, 아프면 아픈 대로, 두려우면 두려운 대로"
반짝이는 아주 작은 별이 열 달 동안 무사히 자랐고
새벽길. 깜깜하고 두려움의 산길을 잘 통과했으며
이제까지 잘 살아낸 나 자신이 한없이 자랑스럽고 사랑스럽다.
그냥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생일 축하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