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퍼링의 지난한 과정들
결국 나를 성장시키는 일
눈을 뜨자마자 더 자고 싶다. 피곤하여 눈이 안 떠진다.
아니 뜨고 있지만 정신이 함께 돌아오기 전까지 버퍼링이 필요하다. 하지만 내 정신과 육체의 연결은 사춘기 아들의 밥 차려 달라는 말에 단숨에 채워졌다. 벌떡 일어나 주방으로 들어가 정신력으로 밥을 차려낸다. 아들을 학교에 보내고 일상을 시작했다.
문을 열자마자 하얀빛의 태양이 나를 반긴다.
그 길로 숲으로 향했다.
나무 사이에 찌그러져 빛나기도 하고, 넓은 들에 가면 둥글게 온전함으로,
물속에서는 그 빛이 잘게 흩어져 반짝이는 소금 알갱이가 된다. 하지만 소금처럼 짜지 않고 달콤한 달고나 마냥 달콤할 것이다. 나는 그 빛을 내 호주머니 가득 담았다
마을 일 때문에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갈등이 있다.
심지어 엄숙하고 평화롭기만 할것 같은 종교단체 안에서도 보이지 않는 갈등이 많이 존재한다고 한다.
갈등이라는 것이 무 자르듯 단칼에 해결되는것도 아니고 명확한 답이 없는것 같다.
마음속에 있는 꺼내지 않은 사소한 것들로 오해가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나중에는 꼬일 대로 꼬이면
해결과는 더 멀어지고 엉켜버린다.
하지만 그 안에서 일을 키우는 사람이나 갈등의 중심 인물이 있다.
"당신은 무엇을 원하는가?"
"이번 일이 어떻게 되었으면 좋겠는지?"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욕구를 모르거나 숨기거나 둘 중에 하나이다.
공동체 안에서 자신이 실현하고자 하는 것의 목표가 무엇이며
자신 안에 꿈틀대고 있는 욕구는 무엇인지 등
지금 이 시점에서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묻고 또 물어야 한다.
답이 필요한 게 아니라 질문을 통하여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하는데 쉽지는 않다.
해답은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건 분명하지만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나에 대해 왜곡하고 있으며 내 탓을 하기보다는 거의 갈등의 원인은 남 탓이고 또 타인 탓하는 것이다.
어른들이 아이들보다 더 해결이 어렵다.
아이들은 쉽게 화해하고 금방 잘 어울리는 데 선생님들이나 부모가 개입되면 일이 더 복잡해진다.
어렸을 때 내가 옆집 오빠랑 싸운 적이 있었다.
그때 엄마가 나가서 그 오빠를 혼내주고 있었는데 오빠 엄마가 오셔서 엄마와 또 싸우셨다.
엄마가 나를 도우려다 우리는 빠지고 두 분 끼리 싸우셨다. 일이 훨씬 복잡해졌다.
몇 년 전에는 딸이 학교에서 친구랑 싸웠다고 담임선생님에게 불려 간 적이 있었다.
나는 평범한 옷을 입고 크게 생각하지 않고 혼자 갔었는데
상대 엄마는 번쩍이는 외제차에 집안에 있는 금붙이는 다 달고 오셨으며 삼촌에 사둔에 팔촌까지 4.5명들이
교무실에 앉아 있었다. 담임 선생님이 들어오자마자 쌍욕을 하였다.
"우리 애가 하루 종일 울기만 하고 매일 전화해서 학교 다니기 싫다고 하는데 이게 학교야 이 xx야?"
교장선생님까지 오셔서 여기서 잘 마무리하시면 좋겠다는 말을 할 정도로 일이 커졌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 일이 있은 후 서로 화해를 했지만
부모님이 주신 상처는 고스란히 아이들의 부담이 되었다.
아이들 문제에 부모가 개입하면 일이 복잡해질 뿐만 아니라 더 큰 싸움이 될 수 있다.
선생님을 함부로 대하고 일이 커진 것에 결국 아이는 학교 다니는 것의 힘든 요인으로 작용을 했고
전학을 갔다고 했다.
오늘 밤에는 정말 빛이 필요한 날이다.
호주머니 가득 담아왔던 햇빛을 꺼내 천천히 음미하니 온 몸이 따뜻함으로 충만하다.치유의 빛이 되었다.
나도 질문을 해본다
"내가 왜 이 일을 해야 하는지? 내가 여기에서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 나의 욕망인가? 이타적인가?"
"내가 이 공동체에서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정말 원하는 것, 바라는 것은 뭘까"
결국 나는 나를 알아야 한다.
결국 모든 일은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고 그건 바로 나를 위한 일이다.
공동체도 결국에는 내가 없으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나를 위해 공동체가 필요하다.
공동체를 위해 내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또한 꼭 내가 아니여도 돌아간다.
뭔가를 이루려고 어깨에 힘을 주기보다는
긴장을 풀고 함께 생각하고 함께여서 즐거운 일들을 많이 만들어 한 사람이 주인공이 아닌 모두가 주인공이 되는것이
가장 좋은 공동체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