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파도에는_해녀가_산다_114화
사진작가 현을생의 전시회에 다녀왔다. 제주 시내에 있는 산지천갤러리다. 전시 제목은 <나의 어머니, 제주해녀>. 작가는 1980년대 흑백필름을 꺼내 점점 잊혀지는 해녀들의 웃음과 울음의 세월을 전하고 싶었다고 ‘사진전을 여는 말’에 썼다. 제주에서 나고 자란 현을생은 9급으로 시작한 공직생활의 고단함을 덜고자 카메라를 들고 제주 곳곳을 누볐다. 정년 후인 지금은 사진작업에 매진한다. 나는 해녀에 관한 전시가 눈에 띄면 메모해두었다가 닿을 만한 거리면 힘껏 가본다. 문자와 영상으로 전해지는 해녀들의 숨결도 소중하지만 그림과 사진으로 전해지는 숨결도 놓치고 싶지 않아서다. 또 전시장에서 작가와 해녀 삼촌들에 대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도 좋다. 다음은 사진작가의 시선으로 써내려간 글이다.
해녀들 곁으로 자박자박
나를 몸으로 낳아준 어머니는 해녀가 아니다. 그러나 제주와 함께 살아온, 아니 제주를 살려온 해녀는 내 마음속 어머니다. 사회에 첫 발을 디딜 즈음 사진에 입문했다. 어떤 소재로 사진을 찍을까. 당시 제주의 심장이랄 수 있는 중산간 마을이 개발된다는 소식을 접하곤 기록으로 남기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위기의식에 제주의 자연과 풍물을 찍기 시작했다. 그러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제주의 여인에 관심을 갖게 되고, 그 중에서도 척박한 땅을 일구어가는 해녀들에게 앵글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내 사진에 흐르는 애민의 물결
틈이 날 때마다 나는 해녀 삼촌들 곁으로 가서 밥도 먹고, 잠도 자고, 물질을 나갈 때면 함께 배를 타고 다닌다. 그리하여 가까이 다가가야만 알 수 있는 그들의 마음을 카메라에 담는다. 해녀들은 바당에 함께 드나드는 물벗을 제 목숨만큼 소중히 여기며, 바당에서는 수시로 서로의 생사를 확인하며, 수확이 시원치 않은 동료의 테왁에 물건을 슬쩍 넣어주는 아량을 베풀기도 한다. 이 짙은 애민의 물결이 내 가슴에, 내 사진에 면면히 흐르도록 애쓴다. (*애민: 불쌍히 여겨 사랑함)
쓰디쓴 뇌선만이 나를 구할켜
“난 물에 깊이 들려고 쓰디쓴 뇌선을 먹주게. 깊은 데 들어갈수록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영. 오늘 바당에 들민 살아 돌아올지, 영영 못 돌아올지 알지 못허연. 그냥 나를 보살펴 달라고 요왕님께 빌기만 허주.” 요즘은 진통제 종류가 다양하지만 오랫동안 가루약 뇌선뿐이었다. 약으로 두통을 다스리며 삶과 죽음의 가파른 경계에 서 있는 삼촌들을 찍으며 애처러워 울었고, 한없이 스스로를 낮추는 삼촌들을 찍으며 가여워 울었다. 몇 십 년이 지난 지금도 이 사진을 볼 때마다 운다.
풍랑아, 높이 높이 일어라!
하위직 공무원 시절에는 휴가를 길게 쓸 수 없었다. 사흘 말미를 얻어 섬 속의 섬으로 사진을 찍으러 간 날이 떠오른다. 첫째 날, 해녀 삼촌들은 사진 찍기를 거부했다. 둘째 날도, 셋째 날도 마찬가지. 난 속으로 빌었다. ‘제발 풍랑아 일어라, 섬에 갇혀서 나가지 못하도록.’ 그날 밤, 거짓말같이 거센 파도가 일어 운 좋게도 갇혔다. 마지막 날엔 나의 절실함을 느꼈던지 마침내 해녀 대장이 허락했다. “따라와 보라게!” 그래서 마음껏 셔터를 누를 수 있었다. 다음 날 출근 후? 물론 쪽박 깨지듯 옴팡 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