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가파도에 온 뒤 하루에도 몇 번씩 저 건너 마라도를 바라봅니다. 어느 날부터 둘이 대화를 나눕니다.
‘이리로 오실래요?’
‘아니.’
‘그리로 갈까요?’
‘그러던가.’
그래서 몸이 더 가벼운 내가 갔습니다.
2
햇살 따갑기 전에 도착하려고 이른 시간에 서둘렀습니다. 가파도는 해발 20미터로 평지에 가까운 데 비해 마라도는 깎아지른 절벽이 바닷가에 솟아 배를 대기가 쉽지 않아 오랫동안 외부와 단절되어 있었다는군요. 우리나라 최남단에 위치한 섬이기에 널리 알려지긴 했지만 사람이 살아가기엔 그리 녹록치 않은 자연환경이었던 겁니다. 가파도의 절반도 안 되는 작은 섬, 인구는 반의 반도 안 되는 작은 섬. 한 바퀴 돌고 내려와 짜장면 한 그릇 먹으니 딱 배의 출발시간에 맞출 만한 넓이였습니다. 여기 주민들은 무얼로 생계를 잇는 걸까. 요즘은 섬의 면적에 비해 많은 숫자의 중국집에서 나오는 매출이 큰 비중을 차지할 듯합니다.
3
가파도와 마라도 사이의 물길은 험하기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여기서 자라는 생선은 육질이 단단해 씹으면 꼬들꼬들 쫄깃쫄깃합니다. 육고기 안 부럽지요. 특히 방어가 많이 잡힙니다. 그래서 매년 겨울이면 모슬포에서 방어축제가 열립니다.
4
가파도와 마라도는 자매처럼 친하게 지냈습니다. 풍선(風船)으로 가볍게 왕래할 만큼 지척이었으므로 혼인이나 상사(喪事)에 힘을 보탰고, 물물교환이 잦았지요. 급전이 필요하면 꾸러 가기도 하고요. 풍랑으로 제때 약속을 못 지키자 꾼 돈은 갚아도 되고 말아도 된다는 이야기에서 가파도와 마라도란 지명이 생겼다는 가벼운 소리도 전해집니다. 그 친소가 예전만은 못하지만 몇 해 전에는 해녀 한 분이 실종되었다 우도까지 떠내려간 걸 찾았다는 기별에 가파도 해녀 몇몇이 가서 조문을 했다고 합니다.
5
베프 삼촌과 저녁 산책을 하던 어느 날, 석양 속 하얀 배를 보고 삼촌이 말했습니다.
“우리 배야.”
“?”
나는 말귀를 못 알아들었습니다.
“우리 배라구.”
농담이라곤 도통 모르는 삼촌이 던진 그 말이 농담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마라도를 건너다보며 화답했습니다.
“저건 우리 섬이에요.”
그날 우리는 배와 섬을 거느린 만수르가 되어 있었습니다.
6
이젠 마라도를 바라볼 때마다 아, 저긴 유람선이 닿았던 자리덕선착장, 저긴 성당·등대사진을 찍고 푸른 바다를 내려다보던 절벽, 저긴 짜장면 한 그릇을 맛있게 먹던 곳… 하며 친근하게 여길 듯합니다. 나에게도 자매 같은 섬이 된 거지요. 붉은 해가 바닷속으로 완전히 기울자 멀리서 마라도 등대가 반짝반짝 신호를 보냅니다. ‘이제 우리 각별한 사이 맞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