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_삼촌이_생겼어요

by 배경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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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초~온~!” 하고 달려가며 부를 수 있는 남자 삼촌이 생겼습니다. 멀리서 봐도 만면에 웃음을 띠고 서서 고개를 끄덕입니다. ‘어서 오라게.’ 속으로 반기는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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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촌. 제주에서 남녀를 불문하고 손위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여자 삼촌, 남자 삼촌이란 말은 없지요. 그런데 나는 오늘만 남자 삼촌이란 말을 쓰겠습니다. 허안유. 남자 삼촌입니다. 안유. 이름도 마음에 듭니다. 가파도에서 태어나 자라고, 청보리농사를 50여 년 지은 어른입니다. 가파도 관련 유튜브에서 먼저 만났습니다. 새벽빛이 보리 위로 떨어질 때부터 황혼녘까지 너르디너른 밭에서 묵묵히 자연을 일구던 화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농사는 주인의 발자국으로 큰다고 해. 밭에 자꾸 드나들어야 해. 그러면 피 하나라도 더 뽑을 거 아니?”

“보리 덕에 나가 사는 건지, 아니면 보리가 나 덕에 사는 건지 몰러. 같이 따라가는 거라. 으응, 가족같이….”

“농사라는 것도 자연이 하는 거니까 자연이 하는 걸 일개 인간이 어떻게 이길 수 있어? 한 해에 안 되면 새해에, 새해에 안 되면 또 새해를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는 좋은 날이 돌아옴지게.”

말 한 마디 한 마디에서 진정성이 우러나는 농부, 평생 한 가지 일로 도를 터득한 듯한 기품, 끝없는 들을 경건하게 바라보던 그 눈빛이 강하게 머릿속에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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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파도에 와서 처음 만났을 때 영상보다 잘생겨서 놀랐고, 매력적인 중저음은 똑같아서 한 번 더 놀랐습니다. 도시든 아니든 남자사람들은 표정이 없고, 타인에 대해 무관심한 듯 보이지요. 그런데 삼촌은 아니었습니다. 깔끔한 입성, 작은 일에 무심하고 큰일에 쉬이 흔들리지 않을 듯한 시선, 평생의 미소로 만들어진 부드러운 얼굴 곡선. ‘똑 내 외삼촌 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내가 먼저 다가가는 중입니다. 포구에서, 올레에서, 밭둑에서…, 언제 어디서든 내가 먼저 말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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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촌은 82세. 나이보다 훨씬 ‘청년’으로 보입니다. 쌀가마 정도는 가뿐 들어 올릴 것처럼 온몸에서 단단한 근육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80세를 끝으로 농사에서 손을 놓았다는군요. 힘에 부쳤던가 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곡식이란 농부의 손길이 여든여덟 번이나 스쳐야 한다니까. 현역이 아님 어떻습니까. 50년의 경험담을 끌어내는 건 어렵지 않을 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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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프 순신 삼촌은 가파도의 소프트웨어를 전달해준다면 안유 삼촌은 하드웨어를 잘 전달해줄 듯합니다. 가파도에서 태어나고 평생을 살았으니까요. 전기·수도·농사·가옥·4.3·한국전쟁 등 삼촌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 하루는 중앙로를 같이 걷다가 전망대식당 앞에 있는 무덤을 가리켰습니다. “이 산이 우리 할아버지 산이주게.” 제주에서는 무덤을 산이라 이릅니다. ‘훈장허공지묘.’ 할아버지가 가파초등학교 설립 전 마을 훈장이었다는군요. 삼촌이 웃자 눈꼬리가 내려가고 긍지가 피어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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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삼촌에게 묻고 배워가겠습니다.

5월의 들판에 피어난 갯메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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