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 가파도는 섬 전체가 하늘에서 들이붓는 비를 고스란히 맞고 서 있습니다. 천둥소리는 먼 바다에서 내 귀로 가까워지고, 바람은 동으로 서로 방향을 바꾸며 달립니다. 좀 일관성이나 있던가. 비옷을 입고 ‘블루’의 식당에 건너갔다 오는데 머리가 절반쯤 젖었습니다. 우당탕탕, 바람보다 가벼운 것들은 땅 위에서 몰려다니고. 하루 내내 이 기세를 꺾지 않을 듯합니다. 종일 숨 가쁘게 방문객을 실어 나르던 ‘블루레이호’는 뚝 끊겼습니다. 함성 뒤의 적막은 더 깊어 보이는 법이지요. 당신 있는 그곳에도 비는 내리는지….
2
집에 엎드려 있어야 하는 보리밭 주인은 애가 타들어갈 겁니다. 아, 안 돼…. 릴케는 말했습니다. ‘마지막 열매들이 탐스럽게 무르익도록 명해 주시고/그들에게 이틀만 더 남국의 나날을 베풀어 주소서.’ 세찬 바람을 견디지 못해 보릿대는 꺾일 테고, 영양제 같은 햇살이 절실한 이때 차디찬 비라니요.
3
비바람 불고, 방문객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이런 날은 이심전심 ‘블루’에 ‘육지것’들이 모입니다. 육지것이란 선주민들이 큰뭍에서 온 사람들에게 내리는 가벼운 가림막 같은 거지요. 나와 주인장, 가파도터미널에서 매표일을 하는 경윤 샘, 하늘이 엄마 혜정 씨. 처음엔 삼겹살에 한라산으로 시작합니다. 무거운 허기는 이걸로 대충 메워집니다. 이런, 오늘은 혜정 씨가 와인 세 병을 가져왔군요. 안주는 치즈, 토마토, 치즈, 토마토. 보기 좋은 음식이 맛도 좋다고. 눈으로 먼저 호강합니다. 술이 약한 나는 입술을 축이는 정도로 하고, 나머지는 세 사람이 각 일 병씩을 비워냅니다.
4
창밖에는 비 오고요 바람 불고요 그대의 핼쓱한 얼굴이 날 보고 있네요. 노래가사가 떠오르는 날입니다. 우린 섬 속의 섬만이 가진 독특한 정서를 신기하다면서 나누고, 얼굴도 물맛도 다른 곳에서 살아가는 힘겨움을 토로하기도 합니다. 왜 우린 민들레 홀씨처럼 이 낯선 땅에 떨어뜨려져 사는 걸까요.